나의 일생 11
그 친구는 5대 독자였다... (1)
그 친구는 5대 독자였다. 6대 독자라고 하는 얘기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좀처럼 말수가 없던 나와 친해지려면 친구의 조건 역시 말수가 없어야했는데, 그 친구가 내 친구가 된 걸 보면 아마도 그 친구도 나 못잖게 말 꽤나 안 하던 친구였던 거 같다. 1982년이었나 그 이전인지 그 이후인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극빈층에 가까웠던 우리집 살림살이에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1984년 나의 국민학교 입학 직전에 주택이라는 곳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보다 정확한 고증을 위하여 방금 전에 네이버를 통하여 주민등록초본을 발급한 뒤에 주소지 변경내역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1984-05-23 전입" 정확히는 국민학교 입학 직후에 이사를 가게 되었나 보다. 참고로 "부산직할시 남구 대연동 OOOO"으로부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까지 태어나서 총 58번의 주소가 바뀌었다. 그리고 주소변경순서 1번~16번 사이의 이야기가 바로 어제까지 등록된 "나의 일생 시리즈 중 1~10 에피소드" 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동 6262 동O아파트 나-303 어차피 세월이 그로부터 벌써 40년이나 지났으니 아파트 이름 얘기해봤자 뭐랄 사람도 없다. 그 당시 거기 살던 분들 중에 몇 퍼센트나 그곳을 기억하실런지. 동O아파트. 그 시절 내 기억에는 건물 옆편에 "동O주택" 이라는 커다란 네 글자가 선명히 페인트로 씌여 있었다. 3층 높이에 매우 길다랗게 한 줄로 길쭉하게 지어진 단 한 동의 거대아파트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닌가. 주소가 나동 303호인걸 보면, 적어도 가동/나동/다동 까지 있었던 게 어슴푸레 떠오를 듯도 하고. 어쨌든 아파트의 이름을 가진 연립주택이었다. 그래서 기억에는 복도식이었던 거 같은데, 3층치고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거 같다. 우리집은 3층 꼭대기층이었는데, 애시당초 부실공사로 지어졌는지 비만 오면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다. 집안 살림 중에서 냄비란 냄비는 다 꺼내서 받히고 세숫대야, 물바가지 심지어 밥그릇, 국그릇까지 모조리 갔다다가 받혀 놓아야 안심이 될 정도로 방방마다 거실이며 화장실이며 비가 안 새는 데가 없었다. 집 안에 다용도실쪽엔가 무슨 "쓰레기 투기대" 같은 것도 있었다. 이름이 정확히 뭔지 모르는데, 그 화장터 아궁이 불조절대 같은 작은 문을 열고서는 집안 각종 쓰레기들을 아무렇게나 바로 집어던지면 그걸로 쓰레기 처리는 끝났다. 3층이다가 보니 소리가 날 만한 무거운 쓰레기를 던지면 저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사못 경쾌하고 짜릿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집에 혼자 남아 심심할 때면, 그 쏠쏠한 재미로 이것저것 쓰레기를 찾아서 던지고 놀곤 했다. 실수로 집에 굴러다니던 얄궂은 도자기 같은 걸 던질라치면...바닥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쩅그랑 소리를 발하며 순간 예기치 못했던 정적에 휩싸이곤 했다. 이내 들려오는 아저씨의 목소리. 누가 이런 걸 집어던져서 산산조각을 냈어! 나는 그때마다 혹시나 들킬까봐 숨소리도 안 내고 쥐죽은 듯 잠자코 있기를 여러 차레 반복했다. 들키면 엄청 혼날텐데 그것을 자꾸 반복할만큼 놀잇감 없던 그 시절에는 이른바 "자유낙하놀이" 그것만큼 재미난 것도 없었으리라.
그 다세대 주택에 사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 친구가 있었다. 동O주택에서 국민학교까지는 생각보다 꽤 먼 거리였다. 국민학교 저학년 학생들의 걸음걸이로 길게는 대략 45분~1시간 걸릴 정도로 멀었다. 그 정도면 보통 아버지 어머니였다면 자녀의 등하교 여건을 개선시키기 위해 집 근처 가까운 학교에 입학시켰을 게다. 그 때는 웬만한 거리에 크고 작은 국민학교들이 제법 있었으니까 선택의 폭도 다양하고 넓었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자식의 등하교 편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셨다. 나보다 바로 3살 위, 1살 위의 큰누나와 작은누나가 이미 4학년, 2학년에 다니고 있었으니 그냥 누나들 따라서 너도 똑같은 학교 다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운동회 가서 식구들 모이기도 쉽고(주로 "국기게양대 앞" 이 단골 집합장소였다. 핸드폰이 없던 시대에 다섯 식구 모이기는 정말 하늘의 별 따기 미션이었다.) 소풍날 김밥 쌀 때도 한꺼번에 싸면 여러번 고생 안 하고 좋으니까. 철저히 아버지 어머니 편한대로 결정된 나의 국민학교였고 나의 등하교길이었다. 머나먼 그길을 지각 없이 완주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 참으로 이른 시각에 나와 누나들은 집을 나서야만 했다. 학교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찻길을 지나고 얼마나 위험한 순간들과 마주하였는지 모른다. 집이 워낙 멀다 보니, 실수로 그날 꼭 가져가야 할 준비물이라도 깜빡 집에 두고 가는 날에는... 집에 도로 돌아갔다가는 학교 도착이 늦어서 선도부한테 이름 적힐까봐 두려운 마음에, 미리부터 울면서(준비물 안 가져온 사람 손바닥 맞고 교실 뒤에서 그 수업시간 내내 손들고 서있는 벌이 있었다. 나는 그게 왜 그리도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마치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비참했다. 그 무렵 선생님들 중 어떤 선생님은 그 어리고 순수한 국민학생 아이들의 마음을 어찌 그리 열심히 파괴하려 하셨는지 마치 요사이 홈쇼핑에서 자주 선전하던 "미국산 고급 믹서기" 마냥 영혼까지 한태 넣어서 아주 싹 갈아버리기도 했으니까.) 그날 야단맞을 것을 미리 상상하면서 무섭고 떨리는 마음으로 등교한 적도 여러번 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