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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특급썰렁이 Aug 18. 2024

나의 일생 12

그 친구는 5대 독자였다... (2)

그렇게 집이 멀었다. 학교에서 너무 멀었다. 동O주택에 살고 있는 국민학교 학생 대부분은 그  주택 주변에 있는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내가 그 수많은 집들을 가가호호 다니면서 일일히 호구조사를 한 건 물론 아니겠지만, 누가 어느 국민학교에 다니는지 정도를 알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왜냐하면 아침 등교 시간에 각자의 집으로부터 우루루 몰려나오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일정하게도 곧장 "학교 정문"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로 향하는 무리라고 해봤자 큰누나, 작은누나, 나 뿐이었으니까. 자연 그 동O주택에서 나의 국민학교까지 등하교하는 학생은 나를 포함해서 달랑 3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가뜩이나 날씨가 유독 비가 오고 바람 불고 추운 날에는 장시간 학교까지 걸어서 오가는 그 길은, 어린 국민학교 학생들에게는 정말 히말라야 등반보다도 더 시리고 혹독한 경험이었으리라. 특히 나 같은 저학년과는 달리 30분인가 1시간인가 조금 더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 아침자습문제를 풀어야 했던 큰누나 덕분에, 나는 내 또래 친구들보다 30분은 더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그러니 매일 아침마다 그 멀리 우리 동네로부터 나의 국민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은 우리 가족 세 명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찮게 새로운 사실과 직면하게 되었다. 한 명이 더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그 먼 거리를 걸어서 등하교하는 학생이. 늘상 그러했던 것처럼 누나들과 함께 등교를 하던 내가 그날따라 혼자서 따로 등교를 하게 된 것이다. 아침자습문제를 선생님 대신 판서해야 한다고 큰누나가 평소보다 15분은 더 일찍 집을 나섰다. 작은누나도 자기도 일찍 학교 가서 어제 미처 못 끝낸 숙제를 학교에서 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날도 빨간색 체크무늬 남방은 도저히 못 입고 가겠다고 어머니랑 아침부터 대치하다가... 결국은 어머니에게 직싸게 몸도 마음도 얻어터지고 행여 지각해서 선생님한테까지 쥐어터질새라 부리나케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5분은 걸었을까. 뛰다가 지쳐서 다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이제는 가까운 국민학교로부터 반대 방향으로 접어들어서, 확연히 나 혼자만 남아서 저 건너편 너머 멀리 있는 나의 국민학교로 향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그 무렵... 불과 몇 발짝 앞에서 고개숙여 걸어가는 한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나도 그 아이도 일정 간격 거리를 유지한 채 학교를 향해 걷고 있었다. 마치 마라톤 선수와 페이스 메이커처럼. 어, 같은 학교로 가네? 나의 국민학교 정문을 함께 통과했다. 선도부 형들이 민방위훈련할 때 통장 아저씨, 반장 아줌마처럼 노란 모자에 노란 완장을 차고 막 정문을 차단하기 직전이어서 한숨을 돌렸다. 어 근데, 나랑 같은 반으로 들어간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나와 같은 반 즉 1학년 4반 학급 친구였던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생 처음 국민학교에 들어간데다가 학교생활에 채 적응하기도 바쁜 시기였으니 그 많은 50여명도 넘는 친구들의 이름을 일일히 다 외우기에도 급급한 때라서 그랬던 거 같다. 게다가 나도 극 E 성향에 그 친구도 알고 보니 나 못잖게 말수가 적고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 친구의 이야기를 읊어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슬프게도 그 친구의 목소리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 날 하교길에도 똑같이 단둘이서만, 아침에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면서 나와 그 친구는 서로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단 하나뿐인 국민학교 친구가 되었다. 나의 공식적인 최초의 국민학교 친구였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레 등하교 길동무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는 자기가 5대 독자라고 했다. 자기 아버지가 4대 독자라고 했다. 독자가 정확히 뭔지를 깨닫기에 국민학교 1학년은 다소 어린 나이긴 했지만, 암튼 그 친구의 집에서도 그 집안 식구들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 같았다. 그 이후로 몇 번 주택 근처에서 그 친구 아버지가 퇴근해서 오시는 길에 마주쳐서 인사 드리기도 하고, 그 친구 어머니가 슈퍼 가실 때 인사했던 적도 있는 거 같다.

 

어느 날 주택에서 큰 일이 일어났다. 그 땐 왜 그랬는지, 그 동O주택 바로 옆에 무슨 공장이 있었다. 어느 날 밤에 다섯 식구가 저녁식사하고 나서 주말연속극인지 뭔지 본다고 집에 다 모여있을 때인데, 갑자기 밖에서 무슨 큰 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뭔일인가 싶어 창문을 열었더니 불이야 하는 소리가 나고 바깥에서 시커먼 연기도 보이기 시작했다. 뭐지? 엘리베이터도 없을 때이니 다섯 식구 죽어라 계단을 내려가 이내 주택 앞마당에 도착했다. 어른들은 모두 다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장에 불이 났나 보다. 그 늦은 시각에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도 있고, 공장 한켠 숙소 같은데서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화재를 피해서 대피한 사람들 손에는 일반 가정집에서나 볼 수 있는 이불, 남비 같은 세간살이도 적지 않았다. 소방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한참을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쪽편에 어떤 아줌마가 아기 포대를 허리춤에 차고 등에 무언가 업고 있었다. 불구경을 신나게 하던 또다른 어느 아줌마가 그 아줌마한테 물었다. 등에 업은 거 뭐에요? 우리 아들요. 근데 아는 어디 가고 등에는 베게 밖에 없어요? 실화다. 실수로 불을 낸 "실화"가 아니고, 내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은 실제 사건 그 "실화"다. 실성한 그 베개 업은 아줌마는 몇 차례 불구덩이로 뛰어들어가려다 주변 사람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아이구 아이구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절규 끝에 그 아줌마는 실신하고 말았다. 내 생애 가장 가까이 와닿았던 그 불구경은 웬지 서글프고 처량한 기억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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