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빛나는 시절
분홍 벚꽃이 천지를 뒤덮더니 한순간 사라졌다.
바통을 이어받듯 여기저기 핏빛 영산홍이 무리지어 피었다.
벚꽃이야 대개 키 큰 가로수라 대략 꽃이 필 줄 예상을 한다.
하지만 영산홍은 대개 1m 남짓이고 길가뿐 아니라 동네 여기저기 불쑥 있다.
일 년 내내 존재감 없이 있다가 4월
어느 날 갑자기, 그렇다 갑자기 꽃이 짠! 핀다.
그것도 처연한 핏빛이든 화사한 분홍이든 순백의 꽃무리로.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색들이다.
오랫동안 무심히 지나치던 길, 한적한 도로, 아파트 정문 앞, 둔덕 위, 갑자기 이 황홀한 꽃무리가 보인다.
돌계단 모서리에도
잡초들 속에 숨어있던 앙상한 짧은 가지에도 꽃이 피었다.
"나 여기 있는 줄 몰랐지요?"
"날 좀 봐주셔요" 붉고 하얀 함성!
어마낫 어마낫!
여기에 저기에 이 나무들이 있었네...
물론 이 시기가 지나가면 나는 그 나무가 그곳에 있었는지 또 잊지만.
그 아름다운 짧은 시절을
화양연화 (花樣年華)
in full bloom
이라 한단다.
동네 가겟집 꼬마.
노느라 까맣게 그을린 얼굴, 천방지축의 여자애.
어느 날.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다.
그녀에게 향기가 났다.
새하얀 손은 투명했고 무얼 걸쳐 입어도 빛이 났다.
집안 조카 A.
집안 대소사로 모일 때마다 일을 저지르고 울고 떼쓰던 꾀죄죄한 악동.
어느 날 멋진 청년이 되었다.
나부끼는 빛나는 머리칼.
무거운 짐을 번쩍번쩍 들어 어른들을 도운다.
딸은 평범하다.
특별한 주목을 잘 안 받았다.
그 애가 여자대학의 학생이 되었다.
그 해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온 딸에게 교회오빠들의 식사초대가 이어졌다.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외출하는 딸은 향기 나는 꽃이 되었다.
꽃이 피었다.
둔덕에 숨어있던 영산홍이 화려하게 피어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그때가 그 때다.
당신의 반짝이던 시간.
화양연화.
인생에서 꽃처럼 아름다운 시간.
누구에게나 한 번은 오는 계절.
슬프게도 본인은 모르고도 지나칠 수도 있다.
그때를 지나 본 사람에게는 보인다.
그때를 지나 봐야 보인다.
쭈글쭈글, 검버섯, 파뿌리가 된 머리, 여기저기 무너지는 몸이 되면 보인다.
우리의 빛났던 청춘의 추억은 어린 왕자의 황량한 사막 속의 숨겨진 샘과 같다.
생물학적 시간의 반짝이는 순간도 있지만
또 누구에게나 생의 의미로서의 반짝이는 순간도 있다.
< 소박한 연산홍의 화양연화>
이진순 著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문학동네 출간.
2013년 6월부터 6년간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122명 인터뷰 중 12명을 골라서 출간한 책이다.
그녀는 말한다.
"누구도 완벽한 입지적 위인은 없었다.
누구에게나 내밀한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다.
누구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소심하고, 비루하고, 망설이고, 주저하고, 우물쭈물하고 후회한다.
그러다가
어떤 인생의 고비를 만나거나 결정적 순간이 닥쳤을 때,
그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에너지가 확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다.
누구의 인생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
누구든 80%는 소심하고 이기적이다가 아주 가끔 용감해지고 이타적이 된다.
그 가끔 터지는 에너지가 어느 순간 발화될 때 그게 서로에게 감동을 주고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삶의 어느 길목에선가 자신의 가장 선량하고 아름다운 열망을 끄집어내어 한순간 반짝 빛을 더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망하지 않고 굴러간다.
크리스마스트리의 점멸등처럼 꺼져있다가 잠깐 반짝, 또 꺼져있다가 반짝이는 것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짧고 단속적인 반짝임.
비루한 일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 만의 광채를 발화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순간.
누구에게나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
비범한 순간을 가졌던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인 이 책.
'세월호의 의인' 김관홍 민간 잠수사이야기로 이 책은 시작한다.
카드회사에 다니다 잠수를 너무 좋아해 직업잠수사가 된 평범한 그.
세윌호 사건 때 그는 자원하여 갔다.
그리고 죽었다.
그의 부인의 말.
"거길 왜 갔나고요?
세 아이의 아빠라서요
안타까운 부모마음을 아니까요"
깊은 물속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아이들을 떼어 꼭 끌어안고 한구씩 인양했다.
자기 아이를 생각하며...
그러나 사람들의 오해. 정부의 무책임.
그는 몸과 마음이 무너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결코 돈 벌러 시신수습한 게 아닌데.
세 아이의 아빠이기에 용기를 내어
그의 인생의 빛나는 순간에 불을 붙이고
산화했다.
그리고
외상외과 의사 이국종 씨.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 이은재 씨. 등등
어쩌면 특별한 그런 일을 안 만났다면 그냥 평범하게 살았을 그분들.
아니면 그런 일을 보고는 대부분은 그냥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준비된 사람들이 그 시간을 부여잡고 빛을 낸다.
자기 몸을 태우며.
문득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생각난다.
"네가 아기를 잉태하리라"라는 천사의 말에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
처녀가 임신하면 돌에 맞아 죽는데...
평범한 한 처녀의 순종이 역사를 만들었다.
그녀의 위험하고도 빛나는 순간- 수태고지
-이재윤 'Yes'-
현깃증 나는 영산홍의 만개 같은 당신의 젊었던 화양연화는 언제였나요?
아주 예전에 지나갔다고요?
이진순의 이 책을 보며 One More
Chance!
생물학적 반짝임 너머 의미론적 반짝임이 있답니다.
평범한 일상, 최선을 다해 당신 만의 광채를 내뿜는 오늘.
그 <당신의 반짝이던 순간>에 갈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