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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

혹은 섭리

by 제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움켜쥔 것들이 더 많아지고
즐거운 곳들이 더 많아지고
아름다운 추억이 더 많아진다는 것.

내가 가진, 누리는 이것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질까 봐
두렵다.

어느 날,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
어느 날, 나의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졌다.
언제나 내 곁에 있을 줄 여겼는데.

언제나 가면 그곳에 매양 있을 줄 알았던 단골 식당들.
그곳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차곡차곡 쌓았던 웃음, 추억.

언제나 찾아가면 부모님이 버선발로 반겨주시던 친정.
따뜻한 엄마 손, 쑥 향. 맛난 집 밥.
어느 날 사라졌다.
집도 사람도.

예전에 살던 집, 시장, 학교, 서점, 갤러리, 슈퍼...
이제는 낯선 건물이 들어선 그곳들.
한때의 그 시절이 꿈이었나?
가슴이 시려온다.

몇년전 겨울, 제주도 비자림로를 찾았다.
하늘높이 첨탑처럼 치솟은 삼나무 터널 사이로 차를 타고 지나간다.
한때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된 길.
양쪽 삼나무들 사이로 사열을 받으며 지나간다.
한창 탄성을 내며 가고 있는데
아이고머니나...

얼마 전 내린 폭설이 채 녹지 않은 길 한편에 잘려 누워있는 나무들, 나무들...
휑하게 뚫린 한쪽 도로에 굴삭기들이 여기저기 있다.
기다란 나무들이, 그동안 이곳을 행복하게 지나갔던 많은 이들의 추억들을 삼키고 누워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왕복 2차선을 4차선으로 넓힌단다.
아이고.
진작 여기를 자주 들렸어야 했는데...
전국에서 한때 가장 아름다웠던 길이 부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비자림로 한켠에 쓰려진 나무들-



나이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가슴 시린 것들이 늘어난다는 것.
시린 가슴 사이로 바람이 슝슝 빠지니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뼈에 바람이 들고
눈도 입도 쭈그려지구나.

한때 사랑했던 그 사람이
한때 즐겨갔던 그곳이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더 이상 못 보아서
더 이상 못 누려서 가슴이 시리지만
생각해 보니 내 욕심이다.
빈손으로 이 땅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그 여정.
어차피 처음부터 내가 만든 것은 하나 없으니 내 것은 아니었다.
소풍같이 잠깐 왔다 가는 그 길에서 나비처럼 살포시 깃들었다가 날아가는 꿈인 듯 만나고 누린 것들.
감사해야지.
그동안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했던 그 시간들을.
그 사람들을.
그곳들을.
눈물을 닦고 마음을 추스르고.
딱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가 시절인연 時節因緣이었다.
딱 거기까지가 하나님의 섭리 攝理였다.
딱 거기까지.




마음을 다해서 사랑했던 사람에게는
마음이 남지 않는다

그래서 떠날 수 있었다

줄수 있는 마음이 더 이상
남지 않아서"


-한섬의 시 '마음을 다하여'-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3장 1절~23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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