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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신발

돈으로 살 수 없는 평안의 신발을 찾아서

by 제이

-pngtree에서-


신발
정진숙(1954~)

봄이 길가 신발 가게에
노란 꽃 신발을 내놓았어요

나비가 신어 보고
그냥 두고 갔어요
벌이 신어 보고
그냥 두고 갔어요

몇 날 며칠 놓여 있던
노란 꽃 신발

없어졌어요

씨앗 몇 개
신발값으로 남겨 놓고
신고 갔어요.


90년대 초 미국에 잠시 거류할 때, 병원에 들를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의사가 운동화를 신고 있는 것이다. 아니, 운동화는 학생들이나 운동할 때 신는 게 아닌가? 나는 그게 눈에 설었다. 의사가 품위 있게 점잖은 구두를 신어야지 운동화라니.
그 당시는, 어른들에게 운동화란 생필품은 아니고, 운동회가 있는 날이나 신는 신발이었다.
1~2년 동안 한 번도 신을 일이 없을 때도 있었으니.
84년, 융프라우 정상에 아들 유모차 끌고 오를 때도 (물론 산악열차 타고) 나는 굽 있는 샌들을 신은 상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최근 나는 운동화 값을 알고서 깜짝 놀랐다. 1999년 모 방송에서 '천정부지로 오르는 운동화 값'이란 제목하에 20만 원짜리 운동화 값이 언급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21년에는 나이키와 디오르가 협업한 300만 원짜리 운동화가 나왔다.

60년대 내가 초등학교 시절, 아기들은 고무신, 학생들은 끈 없고 바닥에만 고무창이 있는 심플한 헝겊 운동화를 신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복, 가방처럼 신발도 학교에서 지정한 똑같은 운동화를 신었다.
신발이란 지겹다고, 낡았다고 후딱 새것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대개는 설이나 추석이 되어야 새 신발을 얻어 신는다.
동네 시장 신발 가게나 리어카에서 엄마가 명절 전 즈음, 사 주시는 운동화.
기차표, 말표가 메이커라면 메이커였고 대개는 이름 없는 운동화.
그때는 메이커라는 단어조차도 없었다.
새로 산 신발을 머리맡에 두고 자는 명절 전날 풍경.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린고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새신을 신고 뛰어 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새신을 신고 달려보자 휙휙
단숨에 높은 산도 넘겠네
-윤석중작사-

얼마나 새신으로 행복했으면
하늘까지 점핑했을까?
그 신을 신으면 손오공처럼
산들도 넘나들수 있다니...
요즘 나이키 같은 신발로는 택도 없다.

어떤 이는 신발이 닳을까 봐 사람 없는 길에서는 맨발로 걷다가 사람 인기척 나면 얼른 신 신었다는 얼마 전 옛날이야기.

직장인이 되면서는 구두를 신었는데 거진 맞춤 구두였다. 동네마다 양장점이 있듯이 제화점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구두도 운동화에도 브랜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운동화는 외국 브랜드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운동화가 부유함을 나타내는 증표로 쓰인다니.
80년대 가난한 어느 대학생은, 외국 운동화 브랜드의 하나인 낫 모양을 검정 고무신에다 새겨 신고 다니더라.
대한민국 대부분의 중, 고등학생들이 신는 운동화가 몇 개의 외국 브랜드로 통일되어 버렸다.
부모들은 학교에서 운동화 때문에 애들이 기죽지 않도록 엔간한 브랜드의 운동화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어떤 애들은 일부 명품 스니커즈를 사기 위해 편의점 알바를 한다고 한다.
10대들 사이에는 명품을 지니지 못하면 또래집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60만 원대 명품 브랜드 신발도 있단다.
운동화가 그들의 자부심이 되었다.
소년원 봉사로 그곳을 드나들었다.
그곳에서는 끈이 허용되지 않으니 끈이 없는 찍찍이 밴드 운동화가 원생들에게 일괄 지급된다.
그곳에서는 이른바 어깨형들이 슬리퍼로 신분을 나타낸다.
이른바 브랜드 슬리퍼.
자기 것이든 아니면 아랫것들 누구에게서 상납을 받았든.
그래서 소년원에서는 슬리퍼로 원생의 지위가 드러난다.

신발.
본래의 기능은 발을 보호하는 것.
청소년들의 자기 신분 과시의 표현 수단도 된다.
이젠 신발이 재테크의 수단도 되는 시대가 되었으니. 이른바 슈테크.(슈즈 재테크)
리셀(resale, 되팔기)
유명 브랜드에서 출시한 한정판 운동화를 구입했다가 가격이 오르면 재 판매하여 시세차익을 얻는 방식이다.
한정판이라 제품 확보가 어렵다 보니 부르는 게 값인 제품도 있다.
발매가 22만 7천 원인 한정판
'조던 1X 오프 화이트 시카고'운동화가 2021년 말 1100만 원에 리셀 되었단다.
고가에도 불구하고 이런 거래가 가능한 이유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한정판을 나만 가졌다는 만족감, 패션 감각이 있어 보인다는 과시감 때문이다.
신발 장수도 아닌 사람이 신발로 돈 버는 희한한 세상이 되었다.

TV에서, 아프리카 한 가정을 방영했다.
열 살 난 소녀와 동생이 아침 이른 시간부터 오후까지 호미로 땅을 파고 모종을 심는다. 그리고 받는 보수는 옥수수 세 개.
문제는 아이들 발이다.
신발이 없어 맨발들인데 다리가 퉁퉁 부어있고 가려워 연신 긁는데 아프단다.
아파서 집에서 몸져누워 있는 30대 엄마. 그녀도 다리가 부어 있다. 그로 인해 잘 걷지도 못한다. 그 집뿐 아니다.
동네 많은 사람들이 부은 다리로 앓고 있다.
그곳에 간 한국 NGO들이 나섰다.
도시에서 의사를 데려와 검사를 했다.
코끼리 병!
코끼리처럼 다리가 붓는 병.
그곳 사람들은 그 병을 천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원인은 그 동네의 화산 토양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땅 위를 돈이 없어 신발 없이 맨발로 다녔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형이 아니었다. 신을 신으면 되는 것이었다.

웅장하고 멋진 터키의 사원. 모스크들.
그곳에 입장하려면 하체를 가리고 신을 벗어야 한다.
맨발이어야 입장이 가능하다.
비싼 신발, 저렴한 신발, 브랜드가 의미 없다. 어차피 비닐 안에 넣어야 하니.

태어날 때 신발이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신발이 없다.
구순 넘게까지 게이트볼 즐기시던 아버지.
이런저런 운동화가 신발장에 가득 찼다.
운신을 못하시고 결국 양로병원에 입원하실 때 병원에서는 오직 실내화 한 켤레만 허용했다.
그곳에서 코로나로 황망하게 소천하시고 그 마지막 신인 실내화는 어딘가에 버려졌다...

지구 어느 곳에서는 글로벌 신발 브랜드 회사가 끊임없이 고가의 신발을 만들고 판촉 한다.
세계가 신발로 하나가 되었다.
그 신발 브랜드가 세계적 神이 되었다.
온 세계 추종자들이 돈을 치르며 계속 계속 산다.
신발장에는 계속 신발이 쌓인다.
발이 하나뿐 인 게 안타깝다.

지구 어느 곳에서는 브랜드가 문제가
아니라 모양, 재질이 문제가 아니라 발을 땅에서 보호하는 기본적인 신발이 없다.
그래서 집집마다 환자들이 부은 발을 긁으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지구 어느 곳에서는 천상의 신을 사모하며, 신발은 있지만 그 신발을 벗고 맨발로 그 신을 향해 나아간다.

인생은 여행이다.
여행자에게 좋은 신발은 복이다.
사막을 횡단한 한 여행자에게 누구가 물었다. "사막여행 중 무어가 가장 힘들었어요?"
목마름도 작열하는 태양도 모래바람도 힘들었지만, 신발 안으로 자꾸 들어오는 모래 알갱이 때문에 걷기 힘들었단다.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길이지만 좋은 신발이 있으면 복이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에베소서 6장 15절)

사막 같은 날들이 있다.
전쟁 같은 날들이 있다.
내 힘로서는 기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분이 나 위해 돌아가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으니 그 사랑의 평안을 마음속에 단단히 붙잡아 매야 한다.
상황은 어찌할 수 없으나 내 마음은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
평안의 신발을 잘 챙겨 신어야 한다.
그 귀한 신발을 제대로 신은 자의 여행은 얼마나 평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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