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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ul 13. 2024

30살 된 우리 금성냉장고

반려냉장고


남이야 어찌 생각하든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보물.
금성 냉장고. 1994년도 산.

가전제품들이, 특히 냉장고가 이젠 기능을 넘어 디자인으로 선택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스타일과 재질, 컬러가 유행 따라 변하고 발전한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김치냉장고.
얼음이 나오는 냉장고.
앱에서 터치 만으로 패널색상을 17만 가지 이상 변경할 수 있는 냉장고까지 나왔다.

19년 전,
지금 집으로 이사 왔다.
이사 오는 날, 전에 살던 분이 11년간 쓰던 멀쩡한 투 도어 냉장고를 양문형으로 바꿀 거라며 버리려 했다.
그런데  우리 것보다 용량이 크다.
더욱이 야채수납칸이 넓고 딤채 기능이 된다.
중간에, 살짝 어는 온도의 신선실   freezing coner도 있다.
깨끗하기까지 하다.​​

다들 냉장고를 바꿀 때는 신형이고 나름 용량이 큰 걸 산다.
그런데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용량은 더욱 커진다. 옵션도 더해진다.
물론 더 비싸진다.
내가 쓰던 냉장고도 살 때는 나름 큰 거였는데 저절로 작은 게 되었다.
딤채도 없었다.
어차피 이사하는 김에 오래된 기존 것을 버리고 좀 더 큰 걸 구입하려던 나는 다소 큰 그 집 냉장고를 당분간 쓰다가 새것을 구입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늙은 냉장고가 고장이 나지 않는 거다.
딤채기능의 넓은 야채칸과 신선칸도 있는데.​

이사 간 지 3년 후,  출가한 딸이 첫아이 해산을 위해 친정에 왔다.
"엄마 이참에 냉장고 새것 사드릴게요."
"뭘, 멀쩡한데. 청소만 깨끗이 하면 새 아기에게 해 될 것 없겠구먼."
그 아기가 어느덧  16살 고등학생이 되었다.

하마터면 사망선고받을 뻔했던 그 냉장고는 16년 더 생존 연장!
오늘도 번듯하게 살아있다.
우리 집과 인연이 맺은 지 19년째.

이 애가 우리 가족이 된 후
메이커가  '금성' 골드스타에서 'LG'가 되었다.
흐르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야채 칸 박스 레일이 부서져 여닫을 때 뻑뻑하기는 하다.
신선실 플라스틱 덮개가 금이 가 테이프로 붕대 감았다.
물론 너무나 오래된 모델이라 부품을 구할 수 없다.
AS 차 집에 들른 기사님께서 아직껏 기능상과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진단.

가끔씩 새 냉장고 헌팅을 위해 가전매장에 들른다.
예전 냉장고는 백색 일색이었으나 요즘 냉장고는 예쁜 컬러를 입혔다. 예쁘다...
이런저런 옵션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딤채기능의 넓은 야채칸과 살짝 어는 온도의 신선실이 있는 모델은 없다.
(요즘은 다들 야채 보관 겸용인 딤채를 따로 쓰기 때문인 듯)

수년 동안 남이 쓰던 냉장고.
그러나 멀쩡한, 특수한 기능도 가졌던 그 아이.
유기견 강아지만 입양하는 게 아니다.
폐기 직전의 냉장고를 입양하여 동거하다가
중간에 딸이 폐기하려 할 뻔했던 그 아이.
입양한 지 19년 차의 1994년도 산 30살 된 금성 냉장고.

그동안 이런 모델 저런 모델이 세월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세월을 견디고 충실하게 자기 임무를 잘 감당하고 있는 이 아이.

친구들이 모여 이야기하다가 이 냉장고가 좋네 저 냉장고가 좋네 자랑하면 나는 슬며시 끼어들어 말한다.
"냉장고는 역시 금성(LG ×) 냉장고지.
지금은 사지도 못해요."

일전에 그 가전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몇 자 올렸다.
"저는 1994년도 산 귀회사 금성 냉장고를 고장 한 번 없이 지금껏 멀쩡하게 잘 쓰고 있어요.
80년대에 파리와 미국에서 산 적이 있는데요.
그곳 냉장고들은 고장이 잘 났어요.
특히 냉동실 온도가 올라 갑자기 물이 생기거나, 성에가 생겨 긁어내느라고 힘들었어요.
냉장고는 역시 우리나라 것이 최고네요."
물론, 버린 것을 이어 쓴다는 말은 뺐다.
약간 쪽팔려서.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딸이 이걸 알더니 하는 말
"엄마, 그건 그 회사 칭찬이 아니에요.
쓰다가 버리고, 쓰다가 버려야 장사가 될 터인데 헌 것 받아다 주야장천 쓰면 그 회사 망하지요..."

에쿠, 난 그런 내용 올리면 그 회사가

자기 제품 성능 확실하게 선전해주니 감격해서 혹시 새것 하나 보내줄지도 몰라하는 흑심을 가지고 썼는데...

와인만 연식이 오래된 게 좋은가?
이젠 구하기도 힘든 오래된 예전 냉장고도    나름 좋지.
외국사람들은 오래된 차들을 수선하고 광내어 때로는 퍼레이드도 하며 자랑하는 모임도 있던데.
하기야 요즘 전자제품들은 오래 못 간다.
('계획된 노후화'라고 하던가?)
만일 요즈음 것을  샀다면 적어도 몇 번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버려지는 냉장고, 처치 곤란한 거대한 쓰레기의 최후를 아는가?
나는 어쩌다, 자연보호주의자가 되었다.​

신형이 나오자마자 재빨리 구매하여 쓰는
'얼리어답터'가 있는 반면
나는야
예전 것을 두고두고 쓰는 'slow adopter!'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너무 오래 동거하여 이젠 가족이 된
금성냉장고,
연식이 연식인지라 언제 덜커덕 stop 될지 몰라 조심스럽기는 하다.
마치 아버님이 백세까지 사실 듯이 건강하셨는데  구순도 중반을 넘기신 어느 날, 황망하게 돌아가셨듯이.

이제 칠순이 넘으니 해가 지듯 마지막을 향해가는  나나

이제 서른이 넘으니 언제 덜커덕 돌아가실지 모르는 이 애나

묘한 동지애도 있다.


반려견, 반려묘, 반려식물, 반려돌에  이어 반려냉장고 추가요.

30주년 생일을 조촐하게 했다.

케이크를 사 그녀? 앞에 두고 Happy birthday to you 노래를 불렀다.

식구들이 먹고 남은 케이크는 오늘의 주인공인 금성냉장고 안에 넣었다.

생일날에도 열일하는 그녀.

오늘도 살아있어 고맙다.
어쩌다  우리 집 보물이 된 냉장고!
Happy 30 anniversary!

*후기

이 포스팅이  다음 메인에 떴다.

조회수가 10000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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