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로서 한 가정의 취사를 도맡은 지 사십 년도 넘었으니 지금쯤은 요리의 고수가 될 법도 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매 끼니마다 무얼 식탁에 내어놓을지가 스트레스이고 수십 번을 만든 요리도 또 레시피를 들여다본다.
손님이 오시면 반갑기야 하지만 내어놓을 음식 준비가 은근 신경 쓰인다.
혹 누구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 물으면 답은 "남이 해주는 밥"
나이 들어 실버타운에 들어가면 식사 준비는 끝날라나...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요리가 무엇인가?
주부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축복이 아닌가?
왜냐하면...
요리는 '생명'을 낳는다.
세상에서 요리보다 생산적인 활동이 있는가?
한 숟가락의 이유식들이 모여 누워만 있던 아기를 걷게 하고 뛰게 하고 늠름한 청년이 되게 한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요리의 수고로움을 먹은 결과로 살아있다.
요리는 '사랑'이다.
먹을게 풍족하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 소풍 가는 아침 일찍, 엄마가 만드신 알록달록 소를 넣은 김밥. 그 김밥 만으로도 소풍은 이미 즐거웠다.
대학교 시절, 자취하는 내가 집을 떠날 때 면, 엄마는 반찬들과 김치들을 봉지 봉지 챙겨주셨다.
아침 일찍 먼 길 떠나는 식구를 위해 엄마가 새벽 일찍 일어나 준비한 따끈한 국물. '추운데 든든히 먹고 가거라..'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열어보고 싶었던 학창 시절의 도시락.
비록 밥과 김치뿐이지만 가끔씩 넓게 펴서 얹은 그 귀한 계란프라이.
엄마의 아껴 넣은 그 달걀 하나는 세상 부러울 게 없게 했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자란 게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랐다.
중국의 딤섬(點心).
음식의 한 종류이기도 하지만
이 단어는 음식을 먹으면 그 안에 담긴 정성이 몸 안으로 녹아들어 가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뜻이란다.
(點: 불을 붙이다)
음식은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살린다.
요리는 '기쁨'이다.
내가 수고하여 만든 음식을 사랑하는 이들이 맛있게 먹을 때의 그 기쁨.
부엌에서 찌개를 보글보글 끓이고 있는데 아들 녀석이 다가와 "아" 하며 입 벌린다.
한 숟갈 '후~'하며 식혀 입안에 넣어준다.
"맛-있-다."
밀려오는 행복감.
우리 집의 별식, '버섯 샤부샤부' 요리나 양 배추쌈 된장소스 닭 요리'를 하는 저녁,
"배불러~" 탄식하는 식구들에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 국자 더 건넨다.
요리는 '추억'이다.
김장하노라면 어릴 적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김장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어릴 적 유원지에서 사 먹던 망개떡.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과 바꿔 먹을 만큼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급식용 옥수수빵.
그리워 흉내 내어 만들어 본다. 아니다...
빵집을 지나치다 혹 그때 그 맛의 옥수수빵일까 봐 사보기도 수십 번. 아니다...
그때 그 옥수수를 찾아 오늘도 헤맨다.
외국에 나가면 '순대, 떡볶이...' 말만 들어도 고국이 그립다.
"장어국은 장모님이 최고예요."
남편의 간만의 장모님 칭송.
여름이 되면 엄마가 만드시던 보양식, 경상도식 바닷장어국.
싱싱한 장어들을 삶아 살만 채에 거르고 거른다.
배추를 삶아 만든 우거지와 숙주, 고사리 등등 온갖 야채를 듬뿍 넣어 은근히 끊인다.
산초가루와 경상도에서만 유통되는 향긋한 '방아잎'을 듬뿍 넣어 마무리.
꼬박 한나절이 걸린다.
어느 날, 늙으신 어머니가 교회에서 주일 점심으로 이 국을 만드셨다.
난리가 났다.
이걸로 식당을 차리셔서 언제나 사서 먹었으면 좋겠다고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교회 분들은 어머니의 그 장어국을 그리워하리라.
첫애를 낳을 즈음 친정에 갔다.
출산 기미가 보여 아픈 배를 부여안고 병원으로 나서는 딸에게 엄마는 얼른 장어국 한 그릇을 내미셨다.
"힘내야 하니 얼른 먹어"
수술할지 몰라 나는 결국 먹지 못했고 해산하지도 않는 남편만 포식했던 그 여름의 추억.
여고생 때 어느 식목일,
외갓집에 갔다가 처음 먹어본 생멸치찌개 쌈,
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니...
먹고 먹고 먹어 불어난 배.
이후 그때쯤 친정 가면 그 음식을 해 먹었다.
생멸치는 바닷장어가 그렇듯 일반 마켓에서는 유통이 안된다.
항구 어시장에서 반짝 한시적으로만 살 수 있다.
그곳 사람들만 그때만 누릴 수 있다.
식목일이 되면
나는 외할머니의 그 음식을 먹은 그날이 생각난다.
봄볕으로 나른해지는 날씨, 포만감, 집 뒤의 그 텃밭...
그 도시 사람들은 좋겠다.
자기끼리 맛난 그 음식 먹으니.
친정이 없어진 지금, 그 도시에 갈 일도 없으니 음식은 추억으로만 남았다.
돈 주고도 사 먹지도 못하는 음식들이 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추억의 음식을 남긴다.
요리는 '축제'이다.
어떤 지루한 집회도 식사시간이 되면 왁자지끌 화기애애.
노동의 현장에서도 새참 먹노라면 고생도 잊는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많은 이적을 행하셨다.
치유하시고 살리셨다.
그러나 첫 번째 이적은 결혼식장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
맛난 포도주를 대접하신 것.
밋밋한 무채색의 물 같은 우리 인생이 포도주가 등장하는 컬러풀한 축제가 되게 하셨다.
가정은 세상의 가장 중요한 단위이고 식구는 먹는(食) 입(口)이다.
먹는 공동체.
요리는 '종합예술'이다.
요리는 재료를 얼마만큼 넣고
얼마 동안 조리하고
얼마만큼 담아야 할지를 아는 '수학'이 필요하다.
단 짠 쓴 신의 맛을 배합하고 불의 강도를 조절하는 '과학'이 필요하다.
인간의 입은 익숙한 맛에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인간의 눈은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만든 음식을 어떤 색깔 어떤 재질의 그릇에 어떤 모양으로 담아 어떤 가니시(고명)를 얹어 멋을 내어야 할지를 아는 '미술' 감각이 필요하다.
생선 전 위에 상큼 얹은 홍고추 청고추 한쪽,
식혜 그릇 위에 무심히 동동 띄운 잣 몇 알, 하얀 떡국 위에 얹은 노랗고 하얀 지단과 까만 김,
도미찜은 또 어떤가?
오방색이, 하늘과 땅이 한 마리 도미찜 위에서 펼쳐진다.
갖가지 나물 위에도 노란 볶은 깨를 솔솔 뿌려야 작품이 완성된다.
우리의 할머니들은 생활미술을 배우지 않아도 체득하고 계셨다.
놀라운 이 미적 감각이라니...
음식을 대접하면서 "맛있게 드셔요."라는 말을 어떤 음정, 어떤 높이로 말할지의 '언어학'적 이해도 필요하다.
당근을 싫어하는 아이를 위해서는 은근슬쩍 숨기거나 익혀 섞여 먹이는 고도의 '심리학'도 필요하다.
전등불을 끄고 식탁 위에 촛불을 밝히면 한 그릇 라면도 그럴 듯 해지니 '조명'에도 신경 쓰면 좋겠다.
헤어지기 망설이는 밀당 중의 청춘 남녀.
"제 집에 들어가 라면 먹을래요? "
그 밤, 양초불이 드리우진 식탁에서 라면을 먹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터다.
조명 지식까지 필요한 요리.
프랑스의 르 코르동 블루, 스페인의 알리시아, 미국의 CIA는 최고의 세계적 요리학교다.
요리기술을 주로 가르쳤다.
그러나 요즘은 거기다 더하여 음식의 인문학적 접근으로부터 시작하여 음악, 미술, 건축, 설치, 미식 개념 등을 가르친단다.
집에서 간단히 먹는 한 그릇 라면에서부터 레스토랑 풀코스 요리에 이르기까지 요리는 맛과 모양, 장소에 따른 감성이 어우르진 종합예술이다.
"요리사는 새로운 언어 창조자"
프랑스 세프 미셀 브라 말이다.
학교에서 예술 전공했다고 뽐내지 마라.
시골의 일개 촌부라도 세상의 모든 요리하는 이는 종합예술을 하시는 분들이다.
윤여정 씨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해 돈 벌다 보니 세계적 스타가 되었어요."
우리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요리하다 보니 종합예술가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