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의 종말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읽고

by 강지영

조용한 시골에서 홀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엠마는 문학, 음악, 연극, 오페라를 좋아했다. 수를 놓고 피아노를 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폭풍우 치는 바다를 동경하고 세련된 도시 생활을 꿈꾸었다. 왕비처럼 저택에서 살고 싶었다. ‘결혼’이 모든 것을 이루어줄 줄 알았다.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골의사인 남편은 자기 할 일에만 충실했다. 엠마의 마음속에 꿈틀대는 욕망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남편을 엠마는 우둔하다고 여기고 무시했다. 엠마는 늘 혼자였고, 엠마는 늘 권태로웠다. 거리의 소음, 극장의 떠들썩한 분위기, 무도회의 휘황한 불빛 아래에서 관능을 충족시키고 싶었다. 엠마는 평범한 가정생활이 싫었다. 권태로운 생활을 숨기고 행복한 척하는 것이 위선이라고 여겼다. 우둔하고 무취미한 남편은 아내의 불륜한 욕망을 부추겼다.


욕망으로 가득 찬 엠마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남자들. 그들은 엠마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불행한 엠마를 향락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엠마의 강한 욕정을 생각해 보면 남자들이 엠마의 정부(情夫)이기도 했다. 게다가 잡화상을 하는 상인은 엠마의 사치성을 북돋아 자신의 부를 챙긴다. 이 상인은 엠마와 샤를의 파산을 불러오는 결정적인 인물이다. 영화 <보바리 부인>에서 상인은 “돈은 문제가 아니다. 해결책일 뿐!”이라고 하면서 엠마를 유혹한다. 사치와 향락에 젖었던 엠마는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서서히 조여 오는 파산의 위험을 알아채지 못한다. 파산으로 고통받는 엠마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토록 달콤한 말과 손길로 엠마를 애무했던 남자들은 엠마의 고통에 나 몰라라 했고 모욕감을 주었다. 엠마는 더 이상 삶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비소를 먹고 죽음을 선택했다. 슬픔에 젖어 있던 남편 샤를은 삶에 대한 회한과 엠마에 대한 그리움에 몸부림쳤고, 그녀가 좋아했던 사치품에도 관심을 가졌다. 엠마의 죽음은 남편을 타락시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샤를도 죽음을 맞이한다. 엠마의 사랑과 동경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쾌락이었다.


영화 <보바리 부인>을 보자. 엠마는 혼자서 옷도 벗지 못한다. 결혼 전에는 하녀가 벗겨주었을 것이고, 결혼 후 첫날밤엔 남편이 벗겨준다. 드레스의 뒤가 끈으로 묶여 있기 때문인데, 누군가가 뒤에서 풀어주어야 한다. 드레스를 벗고 나면 허리를 보정해 주는 코르셋이 나오는데 이 또한 누군가가 등 뒤에서 끈을 풀어주어야 한다. 물론 입을 때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터. 엠마와 샤를이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나뭇가지에 쳐진 거미줄이 나온다. 거미줄에 이슬이 맺혔다. 거미줄에 걸린 벌레는 꼼짝 달짝할 수가 없다. 그러다가 거미는 그 작은 벌레를 잡아먹는다. 영화의 줄거리를 한 장면으로 압축한 느낌이다. 쾌락의 거미줄에 걸려버린 작은 곤충, 그게 엠마다. 엠마가 연인들과 밀회를 즐기고 오는 길에서 마주치는 시골 여인들은 생활인의 모습이다. 하얀 앞치마를 둘렀다.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간다. 등에 땔감을 지고 가는 여자도 있다. 가진 자의 안락은 못 가진 자의 노동으로 가능한 법이다. 마차 안에서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자도 있다. 영화에서 엠마는 자기 집에서 독극물을 가지고 나와 숲길에서 외로이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 원작에서는 엠마가 약국에서 비소를 훔쳐다가 마신 후, 남편 샤를 앞에서 죽는다. 독이 몸에 퍼지면서 죽음에 가까이 가는 신체변화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플로베르는 구토를 느꼈다고 한다. 플로베르의 구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던져버리고 물질과 쾌락을 좇는 부르주아에 대한 혐오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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