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말을 알면 꽃이 그냥 꽃이 아니게 된다. 꽃이 하나의 '의미'가 된다. 금잔화의 꽃말이 비탄, 비애라고 한다. 샛노란 금잔화가 달리 보인다. 언뜻 국화꽃을 떠올리게 하는 금잔화의 꽃말이 슬픔을 자아내다니. 얼마 전에 꽃다발을 받았다. 축하의 꽃다발이었는데, 여러 꽃 가운데에 금잔화도 있었다. 꽃집 주인은 꽃말에는 관심이 없는가 보다. 그런데 꽃다발 속에 담겨 있던 금잔화가 가장 늦게까지 싱싱하게 남아 있다. 꽃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오래도록 꼿꼿하게 지지 않고 살아 있다. 축하의 꽃다발, 그리고 비애의 꽃말을 가진 금잔화. 살다 보면 이런 아이러니한 조합도 있는 법이다.
꽃말에 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잘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자려고 하면 할수록 각성이 되는 듯했다. 이러다가 밤을 샐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대출받아온 책을 펼쳤다. 책 속의 주인공 '애디'도 나처럼 잠이 오지 않은 날이었는가 보다. 애디는 이웃해 살고 있는 루이스를 찾아간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같이 밤을 보내자고. 이 글을 읽는 독자시여, 오해하지 마시라. 애디는 대화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고, 때마침 가까이에 루이스 같은 '신사'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신사는 애디의 눈에만 보였다. 애디에게는 축복이다.
주요 등장인물이 여성 노인과 남성 노인인데, 동화 한 편을 읽은 느낌이었다. 다 읽고 나니 세상이 한결 아름다워진다. 내가 읽은 책은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이다. 켄트 하루프는 1943년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인데, 내게는 그의 책이 처음이다. 70대 여성인 애디는 홀로 산다. 사고로 죽은 딸을 가슴에 묻었다. 남편과는 사별했고, 결혼한 아들은 따로 산다. 70대 남성인 루이스도 혼자다. 부인과는 사별했다. 두 사람은 한 마을에서 이웃해서 산다. 노년을 각각 살고 있는 두 사람 얘기인데, 전혀 슬프지도 절망적이지도 않다. 혼자 산다고 다 외롭고 쓸쓸하고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그러던 어느 날 애디 무어는 루이스 워터스를 만나러 갔다. 오월,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바로 전의 저녁이었다.(p. 7)
그렇다. 소설이 시작되기 전부터 애디는 루이스를 눈여겨봐 두었다. 소설의 시작과 함께 애디는 용기를 낸다. 마침내 애디는 루이스의 집으로 간다. 가서 정중히 말한다. 밤에 자기의 집에서 같이 이야기 나누고 같이 자자고. 성적인 호기심이나 단순한 욕망이 아님을 알고 루이스는 기꺼이 동의한다. 그렇게 하여 둘 만의 밤의 여정이 시작된다. 두 사람은 그간 살면서 가슴 아팠던 일, 즐거웠던 일 등을 말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심정을 털어놓기도 한다. 남녀, 한밤중, 침대... 육체를 떠나 정신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음에 감탄한다.
그러던 중, 이 둘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애디의 아들이다. 그는 두 사람의 '밤'에 대하여 편견과 불쾌함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애디는 받아들이고 겪어낸다. 루이스도 마찬가지. 재밌는 것은, 루이스보다도 애디가 둘의 관계를 리드해 나간다는 점이다. 그런 애디가 발랄하다. 애디는 이웃들의 수군거림도 개의치 않는다. 눈치 볼 것 같았으면 시작도 안 했다는 태세다. 자기 인생을 자기 행복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실행한다는 점에서, 나는 애디에게 매력을 느꼈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에는 큰 따옴표가 없다. 대사와 지문이 구별되어 있지 않아 읽기에 다소 불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읽다 보니 작가의 호흡에 맞춰졌다. 따옴표와 같은 문장부호도 작가가 글을 쓰는 데에 군더더기로 여겨질 수도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해 본다. 복잡다단한 우리네 삶을 좀 더 단순하게 하고픈 작가의 열망인지, 아니면 살 수 있는 날보다 살아온 날이 길어짐에서 오는 시간상의 애틋함인지. 이 책에서 큰따옴표 없이 써진 예를 들어 보자. 우선, 상황을 소개한다. 애디가 길을 가다가 미끄러져 골반을 다쳤다. 병원에 입원했는데 루이스가 문병을 왔다. 애디의 아들이 루이스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엄마에게 5분간의 면회만 허용하고 나간다. 이제 애디와 루이스 둘만의 시간이다.
앉지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루이스가 의자 하나를 끌어와 그녀 곁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거기 입을 맞췄다.
그러지 말아요. 그녀가 말하며 손을 거두었다. 지금 이 한순간뿐이에요. 그게 우리에게 허락된 전부예요. 그녀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여기 있다고 누구한테 들었어요?
제과점에서 그 작자한테서요. 그자가 내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괜찮아요?
그럴거예요.
내가 도와주도록 허락할래요?(p. 188)
브런치 스토리에서 본 이동영 작가의 <사람아, 너의 꽃말은 외로움이다> 책 제목이 떠오른다. 사람의 꽃말이 외로움이라니. 참으로 절묘한 꽃말이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제목에서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했다.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다. 단지 외로움을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외로움이 괴로움이 되면 불행해지고, 외로움을 즐길 수 있으면 행복이 된다. 저기 저 책꽂이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은 저자의 외로움에서 나온 창작품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예술가는 외로움을 창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늙어서도 누구에게 기대지 않는다. 도리어 누군가가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된다. 내 감정 내 감각 내 생각에 충실하되 노욕에 찌들지 않는다. 노년이 되어 몸은 쇠락할지언정 품위 있는 언행과 용기를 잃지 않는다.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더해간다. 생명을 사랑하고 자연을 추앙하는 정신이 성숙한다. 이런 노년을 나는 꿈 꾼다.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가꾸어 나가는 사람의 영혼은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 세상이 모두 잠든 밤, 외로운 영혼은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