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화양연화 >(특별판, 2025)
사람마다 영화를 보는 이유가 있고, 영화 중에서도 어떤 장르의 영화를 즐겨 찾는지는 취향의 문제이다. 한 번 보고 즐기는 영화보다는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그래서 오랜 여운을 남기는 영화가 내 취향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일상에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인간의 깊은 속내와 심리적 문제를 그리는 영화에 끌린다. 그런 영화는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는 인생의 거울이다,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다. 영화가 시청각 매체라는 특성상, 배우는 물론이고 삽입된 음악이나 공간적 배경에도 관심이 많다.
이와 같은 나의 취향에 딱 맞는 영화를 최근에 보았다. 그것은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특별판)이다. 특별판이 아닌 <화양연화>는 2000년에 개봉, 특별판은 2025년 12월 31일에 개봉되었다. 영화가 주는 여운이 한동안 내 생활을 잠식하다시피 하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고 극장으로 가시기를.
이 영화에 매료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배우, 음악, 그리고 배경일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외도하는 배우자를 공유한 두 사람, 첸 부인(장만옥 분)과 차우(왕조위 분). 그러니까 첸 부인의 남편과 차우의 부인이 외도한다. 상처를 공유한 첸 부인과 차우. 한 아파트 최근접거리에서 이웃해 살고 있는 첸 부인과 차우는 오고 가는 길목에서 마주칠 때마다 서로에게 빠져든다. 그럼에도 불륜남녀처럼은 되지 말자고 각자의 감정을 단속하고 이별한다. 드라마나 영화의 흔한 소재이다. 그런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이런 '명작'이 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첸 부인과 차우가 사랑에 빠져든 것처럼, 나 또한 이 영화에 빠져든 이유일 것이다.
첫째, 배우! 왕조위와 장만옥은 이 <화양연화>(특별판)을 위해 특화되었다. 왕조위의 눈빛 연기는 <색. 계>를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 영화에서 특히 돋보인다. 자기 부인이 외도를 함에도 묵묵히 견뎌내는 사람이다.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하지 않는다. 자책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거의 대부분 차우는 양복차림이다.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맸다. 심지어 이사하는 날도 그랬다. 잘 빗어 넘긴 머리도 흐트러짐이 없다. 연인과의 이별 앞에서도 담담하다. 꽉 다문 입술과 시선 고정 그리고 연인을 감싸 안은 손길에서 감정의 절제와 깊은 고뇌 그리고 사랑이 전율을 일으킨다.
첸 부인의 절제 있는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색깔만 달라질 뿐 늘 '치파오'를 입고 있다. 치파오는 외견상으로 보아도 몸에 달라붙어서 사람의 행동을 제약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여성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서 관능적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목에서부터 가슴과 엉덩이, 허벅지까지 사람의 몸을 조이는 느낌이다. 마치 제도와 관습과 타인의 이목처럼 말이다. 이런 사회분위기는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960년대에도 심했다.
결혼을 후회하며 남편의 외도에 괴로워하는 첸 부인에게 차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도 당신하고 같은 처지지만 생각을 안 할 뿐이에요. 내 잘못이 아니잖아요. 매일 무슨 잘못을 했는지 자문하는 건 시간 낭비예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서 차우는 평소 꿈꿔왔던 '무협소설'을 쓰자고 제안한다. 첸 부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글쓰기를 함께하기로 약속한다. 한밤에 신문사 편집실을 찾아간 차우(차우의 직업이 신문사 기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담배연기가 푸르게 시작되었다가 하얗게 흩어지는 장면이 인상 깊다. 자신에게 다가온 사랑을 어찌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차우의 내면을 담배연기가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첸 부인과 차우의 미래가 연기처럼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예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기도 한 1960년대에 흡연은 그리 나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낸 1980년대에도 흡연은 낭만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이 자주 찾던 커피숍이나 음악다방에서 담배연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카페인을 줄인 디카페인 커피가 나온 것처럼, 유해성분을 제거한 담배가 개발된다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다음 장면은 두 사람이 각자가 쓴 무협소설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보이는데,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넘어 관능적이다. 신체노출이나 접촉이 없으면서도 남녀관계의 농염한 모습을 자아낸다. 그것은 영화를 봐야만 느낄 수 있다. 맥락이 필요한 대목이다.
둘째, 이 영화가 매혹적인 이유로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유메지의 테마'인데, 일본 영화 <유메지>(1991년)의 대표 주제곡이라고 한다. 이 곡은 <화양연화>의 메인 테마곡이다. 첼로 선율로 이루어진 이 곡은 영화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크게 일조한다. 국수통(보온병)을 들고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첸 부인의 등장에도 이 곡이 흘러나온다. 첸 부인과 차우가 말없이 스치기만 하는 장면에서도 이 음악이 소환된다.
유메지의 테마곡이 나올 때는 시간도 멈춘 듯하다. 그럴 때는 느린 화면으로 처리한다. 마치 시간의 흐름을 잡고 싶다는 듯이. 영화 속 이 곡은 몽환적이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하다. 그들의 사랑이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울림을 주고도 남는다. 그림으로 치자면, 수채화보다는 유화 같은 느낌. 덧칠하고 덧칠해서 느껴지는 두꺼운 질감, 그게 바로 첼로 선율이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 세 번째, 공간적 배경이다. 1960년대 홍콩의 비좁은 아파트와 계단. 언뜻 봐서는 매우 초라한 주거환경이다. 두 사람이 마주 걸어가면 어쩔 수 없이 스치게 되는 옷자락. 운명처럼 다가설 수밖에 없는 주변 환경. 오래된 낡고 초라한 골목길 벽. 그리고 왜 그렇게 비는 자주 오는지.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은 어둑한 밤길에서도 빛을 발한다. 결코 초라하지 않다. 이별을 하고 나서야 탁 트인 공간이 펼쳐진다. 이루지 못한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사원의 벽돌 속에 봉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만의 비밀을 봉인하고 나서야 넓은 세상에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화양연화>(특별판, 2025)에서 시대에 따라 변화되는 사랑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어떠한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자유연애가 가능하다. 법과 제도나 관습보다는 개인의 감정이 우선시 되는 사회 분위기다. 문명의 발전으로 언제 어디서든 기다리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연락하고 대화할 수 있다. 더 이상의 숙고는 필요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개인의 감정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낭만을 중시하지는 않는다. 비좁은 계단으로 국수통을 들고 다니면 근천 맞다고 할 것이다. 돈이 안 되는 글을 쓰면 세상물정을 뭣도 모른다고 폄하할지도 모른다.
특별판에 담긴 9분간의 연장된 장면은 <화양연화>(2000)와는 딴판이다. 요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차우. 슈퍼마켓에 들어온 첸 부인. 낭만의 시대를 지나 일상의 삶으로 돌아온 그들. 2025년의 연인에게서는 어떤 애틋함도 어떤 낭만도 볼 수 없다. 더 이상의 '화양연화'는 없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를 살고 있다.
<화양연화>(특별판) 정보
감독 : 왕가위
출연 : 왕조위, 장만옥
개봉 : 2025.12.31.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국가 : 홍콩
러닝타임 : 108분
배급 : (주)디스테이션
원제 : IN THE MOOD FOR LOVE-25TH ANNIVERSARY SPECIAL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