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을 꺼버리고 속세를 떠나는 것만이 로그아웃은 아니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던 것들을 잠시 끊고 내부, 즉 나에게 깊이 몰입하는 일이라면 모두 로그아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상 속에서 로그아웃을 할 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그 수에 놀라게 되기도 한다. 나는 최근 전자기기와 아주 가깝게 연결된 상태로 로그아웃을 해냈다. 바로 '데이터 되새김질 주간'이었는데, 내 데이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기기와의 접촉이 불가피했다.
나는 '되새김질'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수직적 여행'이라는 개념과도 아주 잘 어울린다. 우리는 살아온 만큼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그저 시간에 따라 '지나가는 것'으로 흘려보낼 것이냐 아니면 '축적되는 것'으로 둘 것이냐를 선택해야 한다. 당연히 되새김질은 후자에 속한다. 내가 과거에 경험해온 것을 오늘에 게워낸 후, 여전히 내게 중요한 것들을 다시 삼키는 일이다. 되새김질의 종류는 다양하다. 지난 일기나 메모를 읽어보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좋았던 경험을 다시 해볼 수도 있다. 가만히 사색하며 근래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 보는 일도 되새김질에 속한다.
여러 되새김질 중에 나는 '데이터 되새김질'을 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내가 모아온 파일들, 텍스트들, 북마크들을 살펴보며 현재 내게 여전히 유의미한 것들을 잘 정리해두는 것으로, 꾸준히 주기적으로 할수록 좋은 일인데 안타깝게도 오래 미뤄둬 데이터가 걷잡을 수 없이 쌓여버렸다. 확실히 미뤄둔 만큼 아이디어나 영감의 발생이 줄었다. 지체할 수 없어 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나의 데이터 되새김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외장하드 정리 2) 나와의 채팅 정리
1) 노트북과 휴대폰에 마구 저장되어 있는 파일들을 외장 하드에 옮겨 정리한다. 첫 번째 단계는 삭제다. 그렇게 중요하던 파일들이 오늘에 와서 그다지 중요해지지 않는다. 주머니 속에서 혼자 촬영된 것만 같은 이상한 1초짜리 영상들부터 생활 꿀팁이랍시고 캡처했으나 그다지 쓸모없는 파일들까지 과감하게 삭제를 시작한다. (이때마다 생각한다. 촬영에도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적당히 찍던가, 중요하지 않은 건 바로 삭제하던가)
두 번째 단계는 폴더링이다. 촬영한 사진들은 보통 날짜로 라벨링 하면 정리가 쉽다. 그러나 영감을 주거나 중요한 정보를 담은 파일들은 실효성 위해서라도 반드시 '잘' 정리되어야 한다. 언제든 필요할 때 열어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때 단순히 '아이디어' '꿀팁'등으로만 대충 나눠 놓으면 정리를 안 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좀 더 구체화할수록 원하는 파일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어차피 나만 보는 폴더니까 멋대로 지어도 된다. 내 폴더명을 예로 들자면 [외부에 휩쓸리지 않고 '나'에 집중하기], [오늘, 현재, 순간을 살자], [겉치레보단 내실, 신념] 등이 있다. 너무 주절주절 같지만 어떤 부분이 결핍됨을 느낄 때 얼른 폴더를 찾아 도움이 될 이야기들을 살핀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나아지는 것이다.
2) 나와의 채팅은 알다시피 메신저 메모용 채팅방인데 채팅방의 즉시성 때문에 정말 유용하게 사용해왔다. 메시지에 답하다가도 생각나면 얼른, 걷다가도, 쉬다가도 떠오르는 게 있으면 바로 적을 수 있다. 물론 여타의 메모 기능들도 괜찮지만, 나를 향해 내가 말을 거는 듯한 그 말 풍선이 좋다. 게다가 말풍선으로 단락을 정리하는 것도 편리하다.
알고 보니 무려 2020년 7월부터 정리를 해야 했다. 2년 치 메모라니 까마득했지만 내 얘기들이라 괜찮았다. 차근차근 읽다 보면 과거의 나에게 이상한 연민을 느끼거나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하고 아주 여러 감정을 느끼게 된다. 뭐랄까, 일기랑은 다르게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주는 힘이 있었다. 반성들이 가장 많았고 감상이 그 뒤를 이었다. 목표들도 있었는데 실제로 해낸 것들이 더러 있어서 그것도 좋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라고 놀라게 하는 여러 아이디어들까지. 이 채팅방을 다시 훑어보지 않았다면 전혀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여전히 마음이 동하는 문장들을 필사하고, 이제는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혼자 반박도 해보고, 잊어선 안 되는 것들은 따로 저장해둔 후 난 뿌듯한 마음으로 채팅창을 과감히 밀었다!
데이터 되새김질 주간을 보내고, 오히려 많은 용량의 데이터가 내게서 빠져나갔음에도 이상하리만치 포만감을 느꼈다. 모처럼 건강식으로 배가 편안한 느낌이랄까! 어쩌면 그간 묘한 허기짐이 가시지 않았던 것은 소화되기 어려운 것들이 어딘가에 걸려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처럼 정보가 지나치게 방대한 시대에, 여러 경험으로 허겁지겁 받아들인 것들을 마침내 게워냈다. 한 가지 다짐한 것은 정기적으로 이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것이었다. 미루면 되새김질할 게 너무 많아져 부담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새롭게 받아들일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는 것보다 이미 내가 확보해온 것들을 다시 펼쳐보는 일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나와의 채팅 정리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