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존재에 관하여.

by 이로하

동료의 세 살배기 아이가 중환자실을 드나들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자세히는 묻지 않아 왔지만, 아빠인 동료는 아이가 자주 아파서 응급실을 가느라

때때로 일을 못했던걸 알고 있다.

이번엔 기간이 길어지면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일이 좀 밀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해는 하지만, 혹시 그 역할을 잠시라도 대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냐고 문의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그런 상태인지도 모르고, 일 때문에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것 조차가 마냥 미안해지는 어느 밤이었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죽음을 겪고, 그 죽음에 관련이 되어 살아간다.

적어도 나의 어린 시절은 그러했다.


어릴 때 너무 착해서 학교에서 “착한 xx”라고 불리던 친구는 전교 1, 2등을 다투던 아이였다.

시험 기간에 기대보다 낮게 나온 성적을 비관했고, 층이 낮은 집에 살던 그 친구는 고층에 사는 다른 친구네 집으로 찾아가 안보는 사이에 투신을 했다.

다음날 시험 끝나고 그 친구네 반 아이들이 울면서 나오는 걸 보고, 얘기를 들었다.

갑자기 전날에 “xx야 안녕~” 하고 인사할 때 나에게 환하게 웃어주던

그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예쁜 외모와 튀는 행동으로 유명했던 동창은 연극영화과로 유명한 학교에 들어가고, 연기를 하고 싶어 데뷔를 했지만 작품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자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 아이가 웃어주던 얼굴도 아직 기억난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일 때, 아는 분이 하루아침에 응급실에 실려갔고

손쓸 새도 없이 의식을 잃어 코마 상태가 되었다.

그분은 그 주 며칠이 지나 너무 금방,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아들 결혼식 때 며느리한테 고맙다는 내용을 손 편지를 써주시는,

마음이 따듯하기만 했던 그런 분이었다.


이후, 나는 허무주의에 빠져 내가 고집하고 지키며 살던 몇 가지를 포기하고 내려놓고 살게 되었다.

죽으면 다 소용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몇 년 지나고 나니, '죽으면 소용이 없는 것'보다

사는 동안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한 십몇년전, 일이 잘 풀리지 않았었다.

내 주변은 모두 잘 사는 듯이 보였고,

그때는 절대 행복보다, 자꾸만 비교행복에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우울증을 크게 앓고 있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고

엄마에게 말했을 땐, 내가 뭐가 모자라냐며

정신병자들이나 상담 가는 거 아니냐는 편협한 반응만 돌아왔다.


이후 자살 시도를 했다.


그런데 어이없게 목을 맸던 틀의 기둥이 헐거워져서

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내 상황과 모습이 너무 우스워졌다.


그때 깨달았다.

죽을 용기와 기운이 있으면

이걸로 한번 살아보려 해보기나 하자.

심각해지지 말고, 그냥 우습게 살아보려 애나 써보자.

해보고 안되면 그때 죽지 뭐. 하는 마음.


뭐 그렇다고

지금까지 살아보니 나 인생 잘 살아와 봤다, 살아보니 정말 좋다 하는 건 아니다.


그냥 단지, 그저 그렇게 행복 운운하지 않고

아무 일 없이 심심하고 평온한 삶만 살아도

그것마저 감사하고 가장 부유한 마음이 든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뭐가 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살아도 돼.

사람 자체로 태어난 것만 해도 기적이니까,

그냥 지내도 돼.

이 마음으로 나이를 먹고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 힘들어할 누군가가,

내가 멋있는 사람이 되지 못해서,

혹은 내가 생각하던 그 인생을 살고 있지 않아서

자신을 책망하며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 수백억 개의 경쟁률을 뚫고

10개월 동안 본능적인 보호본능으로

나 자신을 지키며 힘들게 이 세상에 나와

하루하루를 잘 버티며 사는 우주의 티끌 같은 가여운 존재들이니까.


그것만으로도 정말 괜찮아.

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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