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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pr 19. 2018

왜 제목이 ‘마마돈크라이’일까!

뮤지컬 ‘마마돈크라이’ 보고 다른 말 하기

드디어, 내 피를 제물로 바친 뮤지컬을 봤다.

마마돈크라이. 아~~~~~~~~


“내 피가 너에게 영겁의 시간이란 고통을 줄 거야. 오 플리즈 달링~”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뱀파이어 백작은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으로 찾아온 천재 프로페서 V를 만난다.

그는 V에게 기꺼이, 끝나지 않을 생의 종신형을 선고한다. 죽지 않은 삶은 영원한 고통이라고 고백하면서. V는 울부짖는다.

Mama Don’t Cry, I’ll Be A Goodboy.

표면적으론 V가 백작을 찾아왔지만, 실은 백작이 자신의 은신처인 나비성으로 그를 유인한 것이다.



이 뮤지컬은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지만 명백한 게이 이야기다. 흡혈귀가 송곳니를 찌르며 하는 흡혈 행위는 성행위의 메타포로 잘 알려져 있다.  뱀파이어 백작은 희고 가는 목덜미를 가진 여자 대신, 어리고 미숙한 남자 V에게 송곳니를 꽂는다. 그는 자신을 달의 사생아라고 대놓고 말한다. 보름달과 함께 나타나 자웅동체의 정체성으로 남자와 여자를 모두 유혹한다. (굳이 따지자면 뱀파이어 백작의 성 정체성은 남자와 여자를 다 취하는 ‘바이’에 가깝다.)


프로페서 V 역시 천재였던 아버지를 닮았지만 어릴 때 버림받는다. 그에겐 불행한 엄마밖에 없다.

이 둘은 남자로 태어났지만, 남성성의 결핍을 운명처럼 안고 살아간다. 서로에게 끌리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그들은 다르지만 닮았다. 마치 500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처럼.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어?”

500년 동안 다른 모습으로 살아온 백작은,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V에게 묻는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이건 단지, 내게 목덜미를 내주고 영겁의 시간을 사는 고통을 함께 하겠냐는 질문이 아니다. 나와 같은 정체성을 갖겠냐는, 나처럼 남자까지 유혹하는 삶을 살 수 있겠냐는 생을 뒤흔드는 물음이다. 다른 모습의 삶을 끝내고 싶은 자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은 자는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본다. 그렇게 V는 백작의 지배를 받는다.


백작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지만, 모든 남자들이 그를 사랑한다. V는 오직 한 여자만 사랑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있는 건 백작 밖에 없다. 백작은 사랑의 대가로 죽음을 원한다. 그렇게라도 영겁의 고통을 끝내고 싶어 한다. 백작에게 종속된 V에게 여자는 필요 없다. 자신이 죽인 첫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던 V는 백작마저 죽인다. 뱀파이어가 원하던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서로 번갈아 물어뜯으며 생사를 주고받는 백작과 V의 브로맨스는 처절하지만 매혹적이다. 달빛의 사생아와 아비에게 버림받은 자식은 그렇게 서로의 운명을 개척한다.


치명적인 백작을 연기한 고훈정 배우

뱀파이어 백작을 연기한 배우의 치명적인 카리스마는 극을 압도한다. 화자인 V보다 적은 분량이지만 시종일관 극을 지배하며 끌고 간다. 극 중에 몸의 선이 드러나는 옷에 하이힐을 신고 춤추는 장면이 있는데, 남자가 표현하는 여성성에 매료당했다. 여자의 몸짓을 잘 따라 했다기보다, 암수 한 몸인 생명체를 눈앞에서 보는 듯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왜 탄수화물을 끊으며 수척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마르게 했는지 이해된다.

순진무구한 프로페서 V도 매력적이다. 백작의 아우라에 눌린 듯하지만, 그게 본연의 캐릭터라 자연스럽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락 비트 강한 넘버들은 귀에 머물러 떠나지 않는다. 매력적인 두 남자의 퍼포먼스가 환영처럼 꽤 오래 맴돌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왜 제목이 마마 돈 크라이 일까!


이 극을 보는 내내 왜 타이틀이 ‘마마 돈 크라이’일까 궁금했다. 두 주인공이 커튼콜에서까지 줄기차게 부르는 넘버 마마 돈 크라이는, 개인적인 의견인데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노래는 결코 아니다. 혹시 제목 때문에 연세 지긋한 어머니와 이 뮤지컬을 보겠다고 한다면,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다. 엄마가 봐서 안 될 건 없지만, 나라면 엄마하고 같이 안 볼 것이다.


어떤 남자가 하루아침에 게이가 된다면, 그게 이상한 게 아니고 나쁜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남자의 정체성을 가장 슬퍼할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봤다. 아마 남자를 세상에 내보낸 엄마가 아닐까 싶다. 여자 친구는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의 문제가 아니라, 게이가 된 남자를 보며 가장 정직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엄마다.


V는 어릴 때 아빠에게 버림받은 후 노래한다.

엄마 울지 마세요, 제가 착한 아들이 될게요.

백작을 만나 뱀파이어가 된 후에도 노래한다.

엄마 울지 마세요, 제가 착한 아들이 될게요.


500년을 넘게 산 뱀파이어에게도 낳아준 엄마는 있었을 것이다. 그 엄마는 자기 아들이 영겁의 시간 속에서 남자를 유혹하며 사는 걸 보면 어떤 심정일까. 이념과 가치관을 떠나, 엄마야 말로 유일하게 자기가 만든 생명에 대한 연민의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지 않을까. 같은 부모라도 아빠는 좀 다르다. 사생아와 버림받은 자식은 엄마 때문이 아니라 아빠로 인해 더 많이 생긴다. 이 극에서 처럼.

엄마만이 아들의 고통에 마음껏 울 자격이 있으니, 역으로 엄마에게 울지 말라며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존재도 아들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내 피가 아깝지 않은 무대였고 시간이었다. 한 배우에 대한 편애로 본 것이지만, 다른 배우의 무대도 궁금할 정도로 매력적인 극이다. 이런 남자들을 거부할 여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남자에게만 송곳니를 드러낸다.


각기 다른 캐스트의 무대를 다 보려면 난 뱀파이어 백작에게 얼마의 피를 갖다 바쳐야 할까. 내 피는 영겁의 시간이란 고통 대신, 누군가에게 수혈되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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