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스 Sep 14. 2018

에피퍼니(epiphany)를 기다리며

뮤지컬 <천사에 관하여:타락천사 편> 대명문화공장, 2018.9.13.

천사.. 본 적 있어요? 그림이나 영화 말고 실제로. 어쩌면 못 보고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지. 본 적이 없는 걸.. 믿을 수 있어요? 믿거나 말거나, 천사는 있어. 내가 설명하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지. 존재하는 건 존재하는 거니까.   


  존재하는 건 존재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 남자.바로 그다! 고훈정!


  "이거 아니야! 놀라든지 두려워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의심이라도 해야 내가 춤이랑 노랠 마저 하지."

  이렇게 귀엽게 당황하는 천사는 처음 본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그는, 깜찍하게 더블체크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했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 나타나는 실수를 한다.  


2018. 09. 13. 캐스트


  뮤지컬 『천사에 관하여:타락천사 편』은 인간 예술가들을 돕는 천사 루카와 그를 방해하는 타락천사 발렌티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조수 자코모의 이야기다. 고훈정 배우와 홍승안 배우의 공연은 매우 유쾌하면서도 애잔했다. 천사의 사랑은 설레었지만 자코모의 비밀은 안타까웠고 다빈치의 연민은 서글펐다. 그 와중에 루카는 갑자기 나타난 발렌티노에게 자긴 루캉이라며 앙증맞게 정체를 부인한다.   


  발렌티노와 자코모를 연기한 홍승안 배우는 처음 봐서 낯설었는데, 자코모에 어울리는 순수함과 발렌티노로 변신했을 때 느껴지는 다크한 매력이 인상적이었다. 고훈정 배우와 합을 맞춰 연출한 무대는 또 보고 싶을 만큼 진정성이 느껴졌다.  



  권위와 신성을 내려놓고, 가식과 위엄을 벗어버린 천사 루카는 실수투성이에 깨방정까지 떠는 재간둥이다. 게다가 잔망스럽게 앙탈까지 부린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귀여운 천사 앞에서, 나와 친구는 또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었다. 루카로 변신한 고훈정 배우.. 참 아름다운 남자다. 이 무대에선 날카로운 카리스마보다 앙탈에 가까운 귀여움과 설레발에 무게 중심을 둔 듯하다. 루카일 땐 실수하고 당황하며 약 올라하지만, 다빈치일 땐 곱상한 연장자로 변신해 예술가의 고뇌를 토로한다. 루카와 다빈치를 오가며 숨 가쁘게 대사를 내뱉다가 엄숙하게 노래하고, 엄청난 에너지를 뿜으며 춤추는가 싶더니 날다람쥐처럼 무대를 누빈다. 게다가 원근법을 무시한 얼굴 크기까지. 그에겐 어떤 천사가 강림했기에 이렇게 눈부신 재능을 주셨을까.


고훈정 배우


  그는 슬럼프에 빠진 인간 예술가를 돕는 천사를 연기하고 있지만, 가끔 진짜 천사처럼 우리를 변화시킬 때가 있다. 전에 안 보던 공연을 보게 하고, 콘서트홀로 이끈다. 친구와 안 하던 이야기를 하며, 관심 없던 것에 주목하고, 빈번하게 기뻐하고 슬퍼하며 아쉬워한다. 내가 작곡가 말러가 궁금해 그에 관한 두꺼운 책을 찾아 읽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난 예술가는 아니지만, 생의 어느 순간에 닥칠지 모를 나만의 에피퍼니(epiphany)를 꿈꿔왔다. 기다리고 찾아 헤매지만 천사나 신기루, 혹은 뮤즈처럼 존재를 믿고 싶은 ‘아득한 어떤 것’일 뿐이다. 아직까지는. 에피퍼니가 오는 순간이 무대에서 본 천사 루카처럼 명백한 현실이 되어 드러나면 얼마나 좋을까. 천사를 만나고 와서인지 더 간절해진다. 메피스토 펠리스가 아닌 루카가 지상에 내려와서 다행이다. 그가 지치지 않고 아름다운 에너지를 뿜어내는 배우라 더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편애는 나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