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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13. 2018

200살까지 살고 싶다는 친구에게

책 <나이 든 채로 산다는 것> 박홍순 지음, 웨일 북, 2018년

  태어난 지 만 8년이 된 나의 제일 작은 친구는 생일을 맞아 즐거워 보였다. 갈비를 뜯으며 200살까지 살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난 농담으로 100살까진 니 이빨로 갈비를 뜯고, 나머지 100년은 임플란트 한 이로 갈비를 뜯으라고 했다. 입가에 덕지덕지 묻히고 먹으면서 철딱서니 없이 웃는 친구는 참 귀엽다.


  노인은 웃어도 안 예쁘다는 말이 있다. 바람직한 발언은 아니지만 이 말을 실감하며 산다. 딱히 내 주변의 노인이 어떻다는 게 아니라, 사람이건 동물이건 늙은 생명체는 솔직히 아름답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10대나 20대가 보기에 많이 늙은 사람이다. 나도 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노인'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이라는 것이 이제부터 내리막 길을 달리는 자전거처럼, 페달을 밟지 않아도 무시무시한 가속도로 '노년'이라는 정착지에 나를 부려놓을 것이다.  


'나이 든 채로 산다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한 유한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노인이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한 사람들에 비하면 (어느 정도는) 축복받은 삶이기도 하다. 그런 축복을 떠올려도 노년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노년을 살다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대부분 그건 '인간의 일'이지 '나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60대 이상의 사람들조차 다가올 70대 80대를 막연히 걱정하며 노년을 미지의 영역으로 치부한다. 사실 겪어보지 않은 시간은 10년 뒤건 하루 뒤건 모두 미지의 영역이다. 10대가 보기에 별 차이 없는 60대나 70대가 한두 해 차이를 따지며 노인네 취급하지 말라고 얼굴 붉히는 건, 듣는 사람 얼굴을 더 붉어지게 한다. 그토록 싫어하고 피하려 발버둥 치는 노인이란 명칭은 누가 봐도 노인인 사람들이 거부할 때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황혼기 노년의 삶을 동양과 서양의 유명한 회화와 문학 작품을 통해 돌아보게 한다. 회화에 드러난 노년의 모습은 결코 아름답진 않지만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울하고 고독한 노인의 표정, 죽음을 연상시키는 어두움, 고달픈 삶이 드러나는 불멸의 작품에선 인류가 절대 피해 갈 수 없는 진리를 엿볼 수 있다. 아름다움이 시들고 고독해지면 소멸해야 한다는 진리.

  노년을 이야기하는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비참할 정도로 후손들 눈치 보며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죽은 듯이 지내야 구박받지 않는다는 노인의 실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현실이 그러니 반박할 수도 없다.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인류가 생겨나면서 더불어 생성된 세대 차이는 계도하고 수정하려 하기보단 그냥 인정하고 조화를 꿈꾸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보편적으로 생각하면, 나와 윗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나의 잘못도 그분들의 잘못도 아니다. 나와 나의 작은 친구들 세대 차이 역시 그러할 것이다. 살아온 세상이 다르면 당연히 관념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한때 젊은이였다 노년을 거쳐간 조상들이 남긴 지혜를 한 자락 엿보면 다음과 같다.


"노년이 이전의 삶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패러디가 되지 않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는 목표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 예컨대 개인이나 공동체, 사회단체 혹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지적이거나 창조적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노년』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멋진 말이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다.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는 목표'를 어떤 식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추하고 완고한 고집불통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세를 위한 헌신이 자신의 가치관만 옳다며 소위 나이로 갑질 하는 것이라면, 울적하고 고독한 노년을 예약한 것이다. 아랫 세대 눈치 보며 무조건 숨죽이고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고 어린 사람이 무조건 틀렸다거나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노년 자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상의 반복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면 어떻게 살아질 일이다. 무의미하지 않은 다른 삶을 꿈꾸기에 절망의 골이 더 깊어진다. … 노년의 세월이 깊어가면서 찾아오는 노화와 주변 조건의 악화는 희망과의 격차를 키운다"


  좀 이상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노년엔 우리를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는 목표를 계속해서 추구하라고 하는데, 저자는 무의미하지 않은 다른 삶을 꿈꾸기에 절망의 골이 깊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승에서 막 튀어나온 것같이 주름으로 가득한 노인이라 하더라도 정열을 품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믿는 노인에게 행복이 기다린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희망고문 대신 일상에 자신을 맡기고 살라면서 정열을 품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믿으라니.. 새겨들으면 아주 모순적인 얘긴 아니지만, 늙을수록 정열과 아름다움을 믿으라는 말이 왠지 공허하게 들린다. 세상에 만개한 정열과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나의 안목은 믿되, 그걸 내 것으로 추구하겠다는 욕심은 버리라는 말이라 해석하고 싶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도, 후손에게 짐이 되지 않게 자립적으로 살 정도의 의미만 추구하고, 너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요하는 원대한 꿈과 헌신은 생명 연장에 방해될 수 있다는 의미로 새겨들을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다르며, 그보다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월트 휘트먼의 시구는 조금 더 위안이 된다. 당연히 그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쓴 것이지만, 그 어떤 지혜와 논리로도 증명할 수 없는 죽음을 이처럼 명징하게 표현한 말은 없을 듯싶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기에, 그 어떤 최악의 상상보다 나을 수밖에 없다. 지속되지 않은 명확한 엔딩만큼 안정적인 게 있을까 싶다.


  헬렌 니어링을 만난 어린 소녀가 "여든아홉 살도 그렇게 나쁘지 않네요."라고 말했다 한다. 그 소녀가 구체적으로 헬렌 할머니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헬렌 니어링은 참 복된 인생을 산 어른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읽은 그녀의 책을 더듬어보면, 육체노동을 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삶 자체보다 그런 소신으로 평생 살 수 있었던 용기와 혜안이 더 부러웠다. 오로지 자신의 뜻대로 살아낸 삶은 다소 고달프더라도 세상의 평가에 상관없이 만족스러울 것이고, 평온한 끝을 기다릴 여유도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책이든 미디어든 자꾸 젊고 트렌디하게 살라고 윽박지르는 건, 그렇게 못 살 거면 차라리 빨리 죽으라는 말처럼 들린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이 말도 가끔 폭력적으로 들린다. 피할 수 없으면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즐기든 심각하든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젊어서도 못 즐긴 사람이 늙었다고 즐겨야 할 이유가 딱히 있나, 젊은이든 노인이든 자립적으로 자유롭게 살면 그만이지. '자유'와 '자립'은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인생에 해당되는 핵심 가치라 생각한다.


  이 세상에 늙음과 죽음을 피할 생명체는 없다. 단지 순서와 시간 차이일 뿐이다. 이 공평한 진리야말로 우리가 노년을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가장 강력한 진정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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