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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08. 2018

당분간 아들 이름은 ‘현남’으로 짓지 않을 듯

책 <현남 오빠에게> 조남주 외, 다산책방, 2017년

  '스스로를 믿기로 선택한 여성의 삶을 정가운데 놓은 일곱 편의 이야기'라는 부연 설명을 단 이 책은, 앞표지 귀퉁이에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작지만 선명한 보라색 글귀를 장착했다. 이 책을 대하는 사람들은 대놓고 페미니즘 소설이라 해서 거북하다와 열렬히 까진 아니더라도 지지하고 연대한다는 응원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자이지만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딱히 규정해본 적은 없다. 남녀차별이나 가부장제의 폐해는 여자만의 굴욕이라기보다,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인간적인 삶을 저해하는 유해요소라 생각한다. 내가 자란 가정에서도 어쩔 수 없이 고착화된 가부장제를 공기처럼 흡수하며 살았다. 때론 부당하다고 느끼지만, 대부분 별 문제의식이 없었다. 지금은 따로 나와 살기에 적어도 집에서는 페미니스트라는 자의식을 갖진 않지만 부모님이나 주변 다른 집 얘길 들어보면 답답하고 한심하다 못해 울컥할 때도 많다. 사회생활에서는 일일이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 나간 남성주의자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의 저렴한 인격과 행태에 분노할 땐 내 위치와 상황을 봐가며 어필하거나 소극적으로 피하기도 했다. 비겁한 기회주의자라 하면 할 말 없지만, 모든 걸 문제 삼고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모든 부당함이 여성주의를 내세워야 할 문제라기 보단 세대 갈등, 사회구조적 문제, 근본적인 인성의 빈약함과 교육 부재에서 오는 트러블과 부작용이라 생각한다.   


  내게 이 책은 페미니즘 소설이 아니라, 페미니즘 성향의 소설가들이 여성주의를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이다. 그러니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열렬히 파고들 이유도 없다. 페미니즘의 정의와 논리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론서와 인문교양서는 얼마든지 있다. 소설이라는 외피에 싸인 이야기를 소비하는 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내 취향을 따른 것이다. 일곱 명의 작가들이 인지하고 보여준 문제의식은 내 예상 범위 내에 있는 것도 있고,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도 있다. 다양한 시선은 곧 다양한 생각으로 파생된다. 그냥 서사만 흡수하면 되는 것도 있지만, 여성을 세상의 중심에 두는 방식이란 점에서 각각의 이야기들은 신선하면서도 뜨끔하고, 피상적이지만 때론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표제작 「현남 오빠에게」는 한 여성의 서늘한 자기고백이다. 10년을 애인이란 이름으로 강현남이란 남자에게 질질 끌려다닌 여자는 차근차근 긴 연애의 소회를 밝히더니 마지막을 '강현남 이 개자식아!'로 마무리한다. 그녀가 편지 아닌 강현남 면상에 대놓고 말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지만, 별 일 아니라고, 원래 그렇다고 여겼던 일들을 의심하며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옮긴 건 속 시원하다. 가부장제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엄마와 갈등하는 30대 딸, 청소년기 아들의 성생활을 둘러싼 이중적인 잣대에 고민하는 중년 여성의 불안한 심리는 너무 현실적이라서 오히려 아득하다. 이 편치 않은 익숙한 기시감은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사라질지, 아니 사라지기는 할지 궁금하다. 임신한 여성이 화성에 떨어진 상황을 그린 판타지와 여성성에 욱여넣어진 (죄 많은) 남성들의 수난은 재난 영화를 방불케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직접 간접적으로 말하려는 페미니즘의 실체가 뭔지 이 책을 덮은 지금도 명확히 잡히진 않지만, 이야기를 즐겨 소비하는 사람으로 (내 성 정체성과 상관없이) 작가들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한 번 더 환기해 볼 기회가 되어 나쁘지 않았다. 각 소설의 다음 장에 달린 작가노트는 왜 이런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는지에 대한 소회가 적혀있다. 사실 소설보다 작가 노트가 개인적으로 더 좋았다. 창작의 비밀까진 아니더라도, 작가의 마음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다는 건 작은 우주 하나를 엿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우주가 내 취향이 아니고 가끔 난해하긴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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