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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05. 2018

신기루같은 이 남자

책 <Why Mahler?> Norman Lebrecht, 2010년

Why Mahler?:How One Man and Ten Symphonies Changed Our World

by Norman Lebrecht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가 궁금해진 건 포르테 디 콰트로(Forte Di Quattro) 《클라시카》음반 네 번째 노래 '신기루'를 듣고 나서였다. 그다지 귀가 밝지 않은 클래식 무식자인 내가 듣자마자 꽂힌 이 노래는 (따뜻하게 느껴질 때도 간혹 있지만 왠지) 서늘하고 애잔한 가운데 정신을 명료하게 하는 아우라가 있다. 물론 《클라시카》앨범의 모든 노래는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다. 특히 기존 클래식 선율을 편곡해 만든 앞의 다섯 곡과 '아베마리아'는 클래식이 왜 영원히 진부하지 않은지, 인간이 왜 음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깨닫게 할 만큼 매혹적이다. 그 와중에 유독 나를 사로잡은 곡 '신기루'는 말러의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 악장을 편곡해 가사를 붙인 노래다. 노랫말도 처연하고 아름답지만 멜로디는... 뭐라 할까 나를 묘하게 사로잡았다.



  생명체라면 피할 수 없는 순간, 고통의 정점에 있을 때 혹은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 이 노래와 함께 세상의 시간을 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평상시에도 난 이 노래를 줄기차게 듣는다)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데, 이 곡에 담긴 함의적 정서가 나의 인간적 본능을 일깨운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 포르테 디 콰트로 성남 콘서트(2017.12.31.)에서 베이스 손태진 군이 말러의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 악장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애도하는 음악으로 쓰여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에도 언급되어 있다.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일주일 뒤, 레너드 번스타인은 말러의 <교향곡 2번>으로 추도사를 대신했다. 또 케네디 대통령 동생 로버트 F. 케네디의 장례식에서는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악장을 지휘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에는 많은 미국 오케스트라가 예정된 프로그램 대신에 말러를 무대에 올렸고, 라디오 방송국들은 편성표와 상관없이 말러 곡을 틀어댔다. 어떤 미국 작곡가는 "구스타프 말러의 가곡과 교향곡은 20세기의 재앙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을 미리 내다보고 애도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말러의 <교향곡 2번>, <5번>, <9번>은 미국이 전 국가적인 슬픔을 표현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용하는 음악이 되었다.


  장례식 단골 메뉴인 것 같은 <교향곡 5번>'아다지에토'는 사실 아내 알마에 대한 연서(戀書)로 쓰인 곡으로, 말러가 서로 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음악을 썼음을 방증하는 많은 사례 중 하나라 한다. 알마를 사랑한 이후로 쓴 <교향곡 5번>부터 말러의 작풍이 바뀌었다 하니, 사랑의 에너지가 창작자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새삼 알 수 있다.


말러의 아내 알마


  한때 망각의 언저리까지 밀려났던 말러의 음악은 1960년대 이른바 ‘말러 르네상스’를 맞으며 그의 교향곡 제목처럼 장대하게 부활했다고 한다. 아마 케네디 장례식에서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이후 말러의 추종자와 마니아들은 말러리아, 말러라이트, 말러리안 등으로 불리며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죽은 지 100년도 더 되어서야 그를 궁금해하며 뒤적거리는 나는 <교향곡 5번>만 전체 실황 동영상(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을 봤을 뿐, 미완성인 10번을 포함해 열개의 교향곡과 가곡들은 간간이 찾아보긴 했어도 제대로 들어보진 못했다. 말러의 생애 전반과 작품 세계를 파헤친 이 책을 읽고 나니, 이 세상에 없는 날카롭고 매혹적인 남자 생각에 설레다 못해 울적해지기까지 한다.


7세 때  말러


  1860년, 보헤미아에서 태어나 50년 남짓한 세월을 유럽의 이방인 유대인으로 산 천재에게 세상은 잔인하고 가혹했다. 말러는 어릴 때 줄줄이 죽어나간 동생들을 보며 어린아이의 죽음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는데, 훗날 세 살 짜리 첫째 딸을 잃는 아픔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런 정서는 당연히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말러는 시대를 앞서 산 리얼리스트이면서, 여러 다른 세계에 속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오스트리에서는 보헤미안으로,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에서는 유대인으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했다고 느꼈던 삶은 어떤 생이었을까. 언제나 어딘가 기댈 만한 곳을 찾던 남자는 작업하던 스코어에 휘갈겨 쓴 절규로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곤 했다. 그는 왜 (언젠가 유출될 게 뻔한) 악보 곳곳에 심경을 표출해 고통을 세상과 나누려 한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짐작한다.


  말러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고통을 세상과 나누었던 작곡가였다. 초기 교향곡에서는 어린이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와 종교적인 옹졸함, 사회적 배타주의를 다루었다면, 후기 교향곡은 우리 모두에게 닥칠 상실의 격통을 까발린다. 주저하느라 말하지 못하는 것도 없고, 초안을 잡기 위해 고심한 흔적도 없다. 자신의 인생을 까뒤집어 보인 말러 덕분에 그의 음악을 듣는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말한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이, 희망적인 것이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절망과 고통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음악이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애도와 치유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의 말러


  사랑하는 여인 알마와 결혼 후 잠시 행복하지만, 말러는 장녀 마리아 안나를 성홍열로 떠났보내고, 자신도 (어릴 적부터 잠복해있던) 심장 내막증 진단을 받는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걸음걸이 수까지 세면서 걸을 정도로 건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예전부터 그의 비타협적 성격과 완벽주의에 반감을 품고 있던 적들의 공세와 19세기 말 유럽을 강타한 반유대주의 여파로 말러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간다. 그러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더 선호하던 메트 이사진들에 밀려 다시 유럽으로 왔다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다. 이후 말러는 죽을 때까지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했다. 이즈음 말러는 끊임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부인 알마의 외도로 인한 충격으로 마음 편할 날 없는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으로 '대지의 노래'인 <교향곡 제9번>, 완성하지 못한 <교향곡 10번>이 있는데, 이 작품들엔 죽음의 공포와 이별의 정서, 알마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뒤엉켜 있다.


  이 책엔 말러의 가곡들과 열 편의 교향곡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는, 방대한 자료에 입각한 깊은 통찰과 묘사로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내게 말러라는 남자는 알면 알수록 더욱 묘연한 유령과 다를 바 없다. 정말 저런 삶을 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삶은 신기루 같다. 그는 치열하게 노력했지만 괴팍한 완벽주의자였고, 사랑에 몸을 던지면서도 배신당한 아픔을 숨기지 않는 남자였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죽음의 공포, 이방인의 소회와 쓸쓸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과 두려움을 동시에 자아내게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자신이 속한 시대의 기대 수준을 넘어서는 창작물을 쏟아내고, 그런 자신의 숙명에 일말의 의구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술가이자 예술 그 자체가 된 이 남자는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는데, 그의 말대로 사후 50여 년이 흐른 후부터 지금까지 말러는 그 어떤 작곡가보다 많이 연주되고 회자되는 음악가다. 화제에 비해 그의 음악은 결코 대중적이지 않다. 듣기 쉽진 않지만, 한번 들으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묘한 힘이 있다.


1909년 빈 궁정 음악감독 시절의 말러


  책을 읽는 와중에 간간이 찾아본 그의 교향곡 연주 동영상을 보며 든 생각은, 말러의 교향곡 전곡과 성악곡들을 다 듣고 감내할 용기가 없으면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다지에토'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하면 '신기루' 때문에 한 발짝 내딛었는데,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 앞에 선 아득한 느낌이랄까, 거대한 거인과 마주 선 경외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면 내 심정을 잘 설명한 걸까. 너무 강렬하게 설레면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이 세상에 없는 남자가 가르쳐줬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인생의 매 순간을 헤쳐나간 그는 생을 가장 빛나게 한 음악과 사랑 때문에 가장 어두운 심연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말러를 알아간다는 것은, 이 모든 걸 함께 감당하는 것이다. 나와는 정 반대 성향인 병적인 완벽주의자의 생을 엿보는 것은, 생각보다 버거우면서도 아찔할 정도로 두근거리는 일이다.


  우선 상실감과 슬픔으로 번민할 시기가 찾아오면, 이 책의 저자가 추천한 대로 <교향곡 9번>의 종악장과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 악장을 들을 것이다. 그 음악이 정말 내 고통을 덜어주고 회복을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러를 이용하는 가장 손쉬우면서 될 수 있는 한 미루고 싶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동안 일면식도 없었는데 하필 이때 왜 말러인지, 나야말로 무덤에 있는 그를 깨워 묻고 싶다. 물론 독일어를 하는 그와 말은 안 통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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