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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28. 2018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책 < The Almost Nearly Perfect People>

* <The Almost Nearly Perfect People>  

by Michael Booth , 글항아리, 2018년


  사는 게 팍팍한 요즘, 나라의 옛 이름 앞에 '헬'이란 명사를 붙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마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먼 나라들이 떠오른다. 스칸디나비아식 가구부터 육아의 천국, 지구 상에서 성 평등이 가장 잘 이루어지고 세금은 어마어마하다는 신비롭고 서늘하고 평화로운 나라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핀란드-이 포진해 있는 북유럽(Nordic). 나에게 그곳은 칭송과 찬양에 가까운 다큐멘터리로 각인되고 책과 영화에서 종종 접한, 산타클로스 마을보다 조금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곳이다.   


  이 책은 덴마크 여자와 결혼한 영국 남자가 10년 동안 북유럽에 살면서 쓴 적나라하고 재치 넘치는 견문록이다. 유럽인이 본 또 다른 유럽은, (그곳에 살아본 적 없는) 아시아인이 본 유럽보다는 덜 생뚱맞고 뭔가 다를 것이다. 유럽인이란 자부심이 흘러넘치는 영국인이 알려주는 (객관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북유럽 5개국의 역사와 문화와 국민성은 놀라울 정도로 신비롭고 약간 우울하다.      


  북유럽은 현재 지구 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진보적이며 현대적인 나라들이 있는 지역이다. 덴마크는 매년 국민 행복지수 1위고, 핀란드의 교육제도는 지구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르웨이는 해저 유전으로 막대한 부를 지닌 복지국가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스웨덴은 국민의 1/3이 이민자인 개방적인 사회다. 최근 경제 위기가 있었지만 빠르게 회복해가는 아이슬란드 역시 작지만 강한 나라 중 하나다. 민주적이고 현대적인 나라들이 아직도 왕족이 건재하는 군주제라는 것도 아이러니다. 지구인들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는 이 강한 나라들은 대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부자가 적고 가난한 사람이 더 적을 때 우리 사회는 참 평등을 이룬 것이다.” 유토피아적 몽상처럼 들리지만 덴마크인은 대체로 평등한 사회를 이룩했다. 역사학자 토니 홀은 그룬트비의 국민고등학교는 “사회 계층, 직업과 상관없이 가능할 때마다 가르치는 것. 그리하여 같은 어머니, 같은 운명, 같은 목적 아래 있다”라는 원칙 위에 설립됐다고 말한다. 그 결과 덴마크 국민 90%가 거의 동일한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뚜렷한 경제 평등은 덴마크인뿐만 아니라 북유럽 전체의 행복과 성공의 밑바탕이다.


  신뢰는 복지 국가의 토대다. 이웃을 신뢰하는 이유는 그들이 나와 같은 세금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아플 때 나와 같은 치료를 받고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 그게 신뢰다. 나이, 성별, 재산, 가정환경, 종교와 상관없이 같은 기회와 같은 안전망을 누린다는 사실은 이웃과 경쟁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게 한다. 물론 이웃을 속일 필요도 없다.  


  사실 이 책엔 복지 천국들의 신비로운 장점도 많이 소개하지만, 그보다 더 적나라한 단점과 실체를 까발려 아연실색할 때가 많다. 북유럽이 춥고 어둡고 활기가 떨어지는 사회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덴마크와 핀란드 사람들이 이토록 술을 많이 마시고 항우울제를 많이 복용하며 심장병과 암 발병률이 높은 줄은 몰랐다.
  느긋하고 아늑함을 추구하는 덴마크 '휘게 hygge' 정신은 국민들을 전반적으로 나태하고 무기력하게 하는 데 일조한다. 덴마크인들은 가장 적게 일하고 가장 많이 쉬며 생산성도 낮다. 그런 국민들이 매년 행복도 조사에서 1위를 한다.

  한 덴마크 신문사 편집자의 이론은 이렇다. "덴마크에서 불행한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누가 저한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는데 제가 잘 못 지낸다고 이야기하면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겠죠. 저를 도와줘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좋다, 심지어는 '최고로 좋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이 말만 들으면 덴마크 사람들의 행복이 가공되고 포장된 것이라 단정 짓기 쉽지만, 우리와는 좀 다른 행복관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는 게 타당할 듯싶다. 어쨌든 그들은 해마다 당당하게 행복하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는 국민이다.  

 

  스웨덴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은 얀테의 법칙에 따라 자기 검열을 한다. 즉 자기 업적이나 재산을 자랑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규칙을 지킨다. 핀란드인은 이런 식의 겸손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아 많은 수출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할 정도다.
  핀란드인은 인정 많은 사람들이지만 고독을 갈망한다. 근면하고 지적이지만 때로 굼뜨다. 자유를 사랑하지만 가게 문을 일찍 닫고, 술을 못 사게 하고, 아파트에서 밤늦게 목욕을 금지하고, 극도로 높은 세금을 부과해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한다. 육상 경기와 운동에 열광하지만 최근 식단 때문에 서유럽에서 심장병 발병률이 제일 높다. 조국을 사랑하지만 좀처럼 좋게 말하는 법이 없다.


  핀란드가 영토의 10분의 1을 어쩔 수 없이 러시아에 할양한 1947년 이후 동서 노선은 말 그대로 나라를 분열시켰고, 핀란드는 이처럼 양분된 상태로 오랜 세월을 버텨야 했다. 12세기 초반 핀란드인은 강대국 전쟁의 한복판에 휘말렸고 이 상황은 냉전과 열전을 거쳐 1945년까지 계속됐다. 핀란드인이 이 지정학적 갈등을 조정한 방식이 핀란드 역사의 근본적 특징이라고 한다. 핀란드인의 정신세계에는 뿌리 깊은 금기들이 몹시 어지럽게 뒤엉켜 있고 두려움도 크다. 스웨덴과의 복잡한 관계, 러시아를 향한 불안감,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과묵하고 사교성 없는 자신들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두려움, 음주와 폭력, 끔찍한 핀란드 내전, 나치에 협력했던 불편한 역사, 1947년의 러시아에 의한 영토 분할, 노키아 도산 공포, 그리고 1990년대 초반 국가 부도 사태와 비슷한 또 한 번의 국가 부도 위기 등이 국민들의 정서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핀란드스러움을 말할 때 흔히 드는 특징-음주, 폭력, 과묵함, 심지어 사우나까지-은 이런 금기의 징후이거나 부작용이다.


  노르웨이인은 본인들의 보호무역주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최근에 노르웨이는 덴마크 치즈에 독단적으로 262%의 수입 관세를 부과해 덴마크인들의 분노를 샀다. 과거 식민지 통치에 대한 노르웨이식 복수다. 이러한 면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노르웨이를 비웃는 이웃 나라들의 수많은 농담이다. 노르웨이인은 늘 동네 바보 역할을 맡는 듯하다. 영국인이 아일랜드인을 비웃는 농담이나 미국인이 폴란드인을 비웃는 농담과 비슷하다. 그 같은 농담은 인종차별적이고 지나치게 단순하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고 식민지주의적이다.


  스웨덴인은 사회생활에서 갈등을 피하는 문화가 지배적이다. 몸을 사리고, 논쟁과 심한 의견 충돌을 피하려 하며, 절제된 표현을 많이 쓴다. 노르웨이인이 스웨덴인을 상대할 때는 문화적으로 충돌하는 일이 많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스웨덴 사람들을 늘 조롱한다.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뻣뻣하고 절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니까. 아마 한국, 중국, 일본의 관계와는 상당히 다르겠지만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3국의 유감스러운 역사적 갈등이 이런 식으로 앙금을 표출하는 게 아닌가 싶다.


  라곰은 스웨덴의 또 다른 중요한 좌우명이다. 적당한, 타당한, 합당한,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합리적인’이라는 의미다. 라곰의 어원은 훨씬 더 오래 전인 바이킹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해지는 말로는 모닥불 주변에서 뾰족한 잔에 벌꿀 술을 나눠 마실 때 이 조심성 많고 배려심 깊은 바이킹들은 너무 많이 마시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잔을 옆 사람에게 건넸다고 한다 (그런 뒤 나가서 수도승의 목을 잡아 찢었다). 라게트 옴 laget om은 '돌리다 pass around'라는 뜻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라곰으로 변했다고 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집단의 자발적인 절제를 의미하게 됐다.


  스웨덴인의 민족성 중 하나는, 그들은 불안감으로 고통받는 짝 없는 외기러기 민족이라는 것이다. 스웨덴인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느니 차라리 계단을 택한다. 설마 하겠지만 진짜 그렇다고 한다. 그들의 더 재미있는 버릇들로는 시골 가기, 얇은 비스킷 먹기, 소리 낮춰 말하기, 논란이 될 만한 대화 주제 피하기 등이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스웨덴 문화가 질서 정연함을 정말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스웨덴인은 세계에서 이혼율이 제일 높고, 1인 가구 수가 제일 많으며, 혼자 사는 노인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다. 이런 현상 역시 스웨덴에서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생각, 즉 사람은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는 믿음을 강화한다. 스웨덴인은 서로 부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자기 문제를 혼자 끌어안고 묵묵히 고통을 견딘다. 유능함은 이런 성향의 한 가지 측면이다. 유능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으며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게 스웨덴인의 궁극적 이상이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 심지어 도움을 주는 일도 낮은 단계의 사회적 금기에 속한다. 스웨덴에선 자급자족과 자율성이 제일 중요하며, 감정이든 호의든 현금이든 모든 종류의 빚은 어떤 수를 쓰든 피해야 한다. 스웨덴 사람들은 심지어 술 한잔도 빚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점은 개인적으로 동의하고 나도 지향하는 삶의 태도다.)




  스칸디나비아의 삶에는 모범적인 면이 많지만 어두운 그림자도 상당하다. 그래도 이들은 지구 상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솔직히 이 책에 북유럽의 어두운 면이라고 묘사해 놓은 것조차, 그들의 평등과 민주와 복지에 대한 실현과 자부심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 느껴진다. 민주주의 제도, 보편적인 무상 교육, 소득 재분배 기능을 하는 조세 제도는 내가 사는 곳도 얼추 비슷하게 따라 하려고 하는데도 (아직 한참 부족하다고 느껴서인지)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행복의 한 가지 열쇠는 삶의 자율성이다. 즉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고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북유럽 지역 사람들이 행복하며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은 세계에서 계층 이동성이 가장 높고, 교육 기회가 평등하기 때문이다. 즉 자유롭게 원하는 삶을 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진정하고 지속적인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삶의 주인이 되고, 자기 의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렇지 않다면 적절한 경로를  통해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기본적인 기회와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생존을 걱정하지 않고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회는, 참으로 요원하고 많은 부작용과 사회적 갈등을 극복해야 가능할 것이다.


  북유럽은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곳이다. 그곳의 어둡고 추운 날씨만큼 서늘한 개인주의를 엿보았는데도 불구하고 한동안 지내보고 싶다. 한 1년 정도. 그 이상은 싫다, 여행이라면 모를까. 지지고 볶고 빡쳐도 (급격한 기후 변화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사계절이 있는 이 나라가 그래도 낫다. 북유럽에 대해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다섯 나라 인구를 다 합쳐도 대한민국의 절반 정도인 2600만 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언어는 다 다르다. 당연한 일인데도 새삼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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