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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Nov 07. 2018

어서 와, 지옥은 처음이지?

책 <The Mandibles:A Family, 2029-2047>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90년대 나온 어떤 노래 가사다. 이제 덧붙여야 한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라고. ('나쁜 일은 손을 잡고 온다'라는 감성적인 표현도 있지만, 그런 감성으로 포장할 정도면 심각하게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이 소름 돋는 리얼한 미래가 현실이 되면 어떨까 생각하니 서늘하면서도 묘하게 통쾌하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얘기가 아니라 삐딱하게 재수 없는 미국 얘기라 그런 것도 있다) 근 미래의 가상현실을 다룬 콘텐츠는 무수히 많지만, 이렇게 (안 좋은 쪽으로) 심장 쫄깃하게 하는 책은 처음이다. 그런데도 이건 정말... 쉣할 정도로 '싸하게' 재밌다. 한 마디로 쩐다!!




  2011년 영화화된 화제의 베스트셀러 『케빈에 대하여』 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버(Lionel Shriver)의 신작 장편소설 『맨디블 가족:2029년~2047년의 기록』은 세계 대공황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9년의 미국 맨디블 가 구성원의 삶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 책도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로 나올 것이다. 분명히!)


  2024년 주요 인터넷 인프라가 마비되면서 수많은 연쇄 충돌 사고와 비행기 참사, 열차 사고 등이 잇따르고 서민들은 심각한 물 부족 사태와 실업난으로 고통받는다. 시민들은 재활용 물을 사용하고, 단백질 식사는 사치가 됐으며, 노숙자 보호소엔 수용자가 넘쳐난다. 그래도 아직 중산층이 건재하고 돈 있는 사람들은 펑펑 쓰며 산다. 플렉스(스마트폰과 태블릿을 합친 유연하고 여러가지 기능을 탑재한 다목적 기기)에서 모든 전자업무를 하고 화상통화와 금융 결재를 하는 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여기까지만 봐도 명치가 답답해지는데, 2029년에 드디어 일이 터진다.



▶ 어서 와, 지옥은 처음이지?


  미합중국의 히스패닉계 대통령(미국은 이미 라티노가 다수여서 공용어도 스페인어지만, 백인들이 은연중에 드러내는 차별과 저항은 여전히 존재한다)은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한 금융 쿠데타에 맞서 채무불이행을 선언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방코르'라는 유럽의 '유로'와 비슷한 국제 통화를 만들어 달러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미국 대통령은 이는 미국의 국채 상환 비용을 높이기 위한 조작이라며, 미국의 우방국 브라질, 인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심지어 대만과 한국까지 가세했다고 성토한다.  


"한국.. 여긴 우리가 통일 이후에 수백억 달러를 지원했잖아요. 배은망덕한 거죠."


  이 책에 스치듯 묘사한 한국은, 2029년엔 (이미) 남북이 통일됐고 미국 지원을 받았지만 중국을 따라 방코르를 국제 통화로 받아들인 '배은망덕한' 나라다. 이 책의 후반부에 가면, 대공황 사태가 마무리되면서 미국 기업들은 세계 각국에 팔리고 U.S.A. 는 분열되어 개발도상국 급으로 전락한다. KFC가 'KOREA FRIED CHICKEN'의 약자가 됐다는 문장에선 실소가 나온다. 작가가 한국 사람들이 유독 치킨을 사랑하는 걸 알고 쓴 건지, 그냥 K에 짜 맞추다 보니 그렇게 설정한 건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실감 나는 공황사태와 몰락은 통쾌하면서도 씁쓸하다.  


  전지전능했던 달러가 2029년에 휴지조각이 되자, 사회 경제적 혼란에 빠진 미국은 순식간에 디스토피아가 된다. 지금 베네수엘라처럼 물가가 가파르게 치솟아 아침과 저녁의 채소 값이 다르고, 대량 해고와 실업으로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성실히 저축하고 달러에 투자한 국민들은 정부에 배신당했다며 울분을 토한다. 종신고용 직장이 사라지고 공무원들마저 해고된다. 사회 기반 시설이 마비되고 공권력이 무너진다. 이 모든 게 불과 몇 달 사이에 벌어진다. 모든 국제 무역과 거래는 중단되고, 자급자족을 할 수밖에 없는 비상사태가 되자 미국인은 해외에 100달러 이상 갖고 나갈 수 없다는 제재를 받는다. 그래 봤자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차 한잔 값 밖에 안 되는 돈이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통화 방코르를 쓰지 않겠다 버티며, 나라에선 국민들에게 강제로 금을 거둬들이는데, 1997년 IMF 때 자발적으로 동참한 한국인들과 달리 미국 시민들은 거세게 반발한다. 정부에서 제대로 금값을 쳐주지 않고 경찰들이 무력으로 수색해 빼앗다시피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 체험, (폭삭 망한 비참한) 삶의 현장! - 맨디블 패밀리 편


  이 급변하는 시간 속에 선대부터 쌓아온 부를 기반으로 중산층이라 자부하는 맨디블 패밀리의 생존 투쟁은 눈물겨울 정도로 짜릿하면서도 (냉소적으로) 웃기다.

  97세 왕할아버지 더글러스와 알츠하이머를 앓으며 미치광이가 된 그의 두 번째 아내 루엘라는, 개인적 불행과 시대적 악이 합작해 떠미는 바람에 비장한 최후를 맞는다. 60대 후반인 커터와 그의 아내 제인은, 평생 언제 받을지 모를 선대의 유산만 바라보다 인생의 회한만 더한다. 더글러스가 관리해 온 가문의 재산 역시 휴지조각이 됐기 때문이다. 솔로인 73세 소설가 에놀라는 90대까지 살아남아 미국이 몰락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보며 짱짱한 노익장을 과시한다. 대하소설 『토지』에서 어린 최서희에게 할머니가 남긴 금괴처럼, 에놀라가 대공황에도 내놓지 않고 숨겨왔던 금이 나중에 큰 활약을 한다. (역시 만약을 대비해 금을 장만해야 하는 건가?!) 커터의 딸 플로렌스 역시 할아버지 더글러스의 유산을 은근 기대했다가 절망한다. 그녀는 대공황이 만든 초유의 사태에 비교적 침착하게 적응하지만 대가족을 좁아터진 낡은 집에서 부양하며 말 그대로 죽을 똥을 싼다.

  개인적으로 40대 중반인 플로렌스가 가장 비참하다고 생각한다. (무시받고 자랑스럽지 않았던) 사회복지사란 직업 때문에 그녀만 유일하게 수입이 있다. 플로렌스는 몰려드는 인척들에게 집을 내어주면서 굶주림과 피폐한 생활을 견딘다. 그녀는 21세기 초반 미국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절을 기억하며 갑자기 추락한 현재를 살아내고 있다. 차라리 아들 윌링처럼 아예 호황시절을 모르면 덜 괴로울 텐데, 그녀의 생애를 관통하며 너무 급변하는 세상은 이 중년 여자를 피곤과 무기력과 분노에 찌들게 한다. 13세 윌링은 경제에 빠삭한 조숙한 아이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언젠가 나아지겠지 하는 어른들의 대책 없는 낙관과 무기력에 결연히 맞서 가족을 이끄는 어린 영웅이 된다.


  플로렌스의 여동생 에이버리는 중산층 삶을 살다가 끼니도 못 때우는 하층민으로 전락하며 생의 격변을 겪는다. 그녀 자신은 허세와 가식을 버리고 생존적 전사로 변신하지만, 남편 로웰은 경제학과 교수직에서 잘린 이후에도 여전히 뜬구름 잡는 소릴하며 무능의 끝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큰딸부터 재수 없는 체제 옹호자가 되는 둘째와 무기력한 순응자 막내까지 다양하게 각자 삶을 이어간다.  


  가문의 막대한 유산을 기대한 가족 구성원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 재산에 실망할 사이도 없이,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장은 실감 나는 정도가 아니라 소름끼칠 정도로 생생하다. 오만하게 구는 미국의 몰락과 혼란은 통쾌한 면도 있지만, 정치적 이유와 위정자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국제 사회의 배신에 고통받는 국민들의 모습은 남일 같지 않다.

  대공황이 일단락된 후, 국민들의 목 뒤에 칩을 심어 소비를 비롯한 경제 활동을 국가가 통제한다는 설정은 섬뜩하다. 팔이나 다리가 아닌 목 뒤인 것은, 척추와 연결된 부위라 (외과 의사를 고용해) 함부로 떼어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잘못 건드리면 전신마비가 될 수도 있다.) 나만 그런가, 이게 조만간 닥칠 무시무시한 현실이 될 거란 예감이 드는 건.   


  멕시코 국경에선 이제 백인들의 불법 역이민이 성행한다. 방코르가 통용되는 멕시코는 미국의 몰락과 맞물려 경제 붐이 일어나 백인들의 밀입국을 삼엄하게 단속한다. 지금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짓네마네하며 꼴값 떠는 미국이 이런 상황에 처한다는 상상만으로 (내가 멕시코인이 아닌데도) 통쾌하다.

  가상 디스토피아를 그린 이 책에서 미국은 몰락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국민의 생산과 소비를 동전(실제로 실물 통화는 없어졌지만) 하나까지 엄격하게 통제하며, 그 명분으로 인간의 자유를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며) 억압한다.


  이 이야기의 유일한 영웅이자 현실주의자이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탈출을 감행하는 윌링이 말하는 자유는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지만, 요원한 꿈같은 이념이 됐다. 근 미래의 몰락한 나라에서는.


  "자유는 느끼는 거 아니야? 어쨌든 연습해야만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난 지금 굳이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지 않아도 되지만, 똑같이 앉아있다고 해도 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그렇지 않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잖아..... (중략)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있는 다른 모든 기회를 내게서 빼앗는다면 나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해. 내가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하면 자유롭지 않은 거야."


  무서운 건, 자유와 돈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경제를 살리고 지킨다는 명목으로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지만, 생존 전쟁을 빡세게 치른 국민들은 반박하지 못하고 따른다. 먹을 게 없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굶을 자유도 있다는 주장은 궤변에 가깝다!) 반대로 생존과 번영이 보장되면 어느 정도의 통제와 억압도 불가피하다고 납득한다. (급격히 경제를 발전시키며 국민의 인권을 억압한 '미친' 군부독재가 생각난다!)

  아무도 빵과 자유를 별개의 것이라 여기지 않으며, 굶지 않을 수만 있다면 자유라는 고귀한 세금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 대공황을 몸소 격지 않더라도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는 건, 돈이 빵과 안전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느 정도의 자유까지.  


  사실 이 순간에도 세계에서 완벽하게 자유롭고 안전한 곳은 없다. 2047년을 사는 맨디블 패밀리가 아니더라도, 생존의 위험은 어느 곳에나 시시각각 존재한다. 내가 사는 곳이 총기 소지가 자유롭지 않고, 당장 먹을 게 있으며, 원화 가치가 급락하는 국가 비상사태까지 안 가더라도, 미세먼지와 옆집에서 흘러들어오는 담배 냄새에 (나름 심각한) 생존 위협을 느낀다.


  삶이 지리멸렬할 때 이 책을 읽으면 약간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너무 생생해서 급격히 우울할 수도 있다. 어쨌든 무척 짜릿하면서도 서늘하게 재밌다. 그리고 자유와 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자유와 금.. 생존에 꼭 필요한 이 두 가지를 사수하기 위해 어느 한쪽을 희생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라니.


  ‘나쁜 일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미덕은, 이게 내 얘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반면 내게 닥칠 일이라 해도 조금도 기이하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그럴 듯 하다. 그래서 짜릿하면서도 압도적으로 두렵다. 아무리 국가 비상사태라도 노인들의 연금은 줄일 망정 없앨 수 없다는 구조적 현상 또한 무척 요상하다. 왜 그런지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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