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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Nov 12. 2018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

책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 하시다 스가코, 2018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었던가, 아니면 다른 러시아 소설이었던가. 아주 오래전에 읽은 소설에 이런 대목이 있다. 신부님이 돌아가셨는데, 사람들은 시신이 부패하는 냄새 때문에 몹시 당황한다. 그 당시엔 인격과 신앙심이 고매한 사람에겐 시취가 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스님이 돌아가시면 사리가 많이 나온다고 믿는 것처럼. 고상하고 거룩한 삶을 산 사람일수록 죽은 후에도 거룩한 아우라가 변치 않아야 한다고 믿었기에, 고상한 신부님의 사체가 부패하는 냄새는 사람들에게 신부의 생전 삶과 신앙심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자비롭지 않다. 나답게 사는 건 어느 정도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나답게 죽기는 참 힘들다. 현대 의학 시스템은 인간의 자연사를 가장 큰 치부로 여기는 듯, 몇 분이라도 더 살려두려고 온갖 기계와 약물과 처치로 숨을 붙여놨다가 원 없이 다 해본 후에야 사망선고를 한다.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된 후다. 사실 사고로 절명하거나 갑자기 심장이나 호흡이 멈추지 않는 한, 현대인은 대부분 병사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병원에서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의료진의 투지에 몸을 맡기고 괴로운 시간을 보낸 후에야 놓여날 수 있다는 얘기다. 죽음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는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 더 두렵다. 만신창이가 되어도 좋으니 1초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정말 싫다. 싫은 정도가 아니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일본의 드라마 작가 하시다 스가코가 '안락사로 죽게 해 주세요'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글에는, 아흔 살이 넘은 할머니의 당차고 또렷한 소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엔 동어반복적인 내용이 많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작가의 조리 있고 설득력 넘치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그녀가 주장하는 그녀 다운 삶의 마무리는 다음과 같다.



1. 원할 때 안락사하고 싶다.

2. 장례식은 하고 싶지 않다.

3. 죽기 전까진 최선을 다해 건강하게 살고 싶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안락사가 합법이 아니다. 대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존엄사는 허용된다. 현재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네덜란드 등 유럽과 미국의 몇몇 주에서만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소생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고, 극심한 고통을 받는 환자에 한해서 허용된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스위스에서는 엄밀히 말하면 안락사는 불법이고 '조력 자살'이 합법이라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의사가 주사를 놓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처방받은 치사량의 마취약을 스스로 먹는 방식을 사용한다. 컵에 든 액체를 다 마시면 몇 분 후 잠이 들며, 약 한 시간 후 고통 없이 호흡이 멎는다고 한다.


  안락사를 허용한 나라 중 외국인을 받아주는 곳은 스위스의 '디그니타스'라는 단체뿐이다. 얼마 전 호주의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104세의 나이로 스위스에서 조력 자살을 했다. 스스로 품위 있는 죽음을 택한 노교수의 선택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존엄사는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는 것으로, 환자의 의식이 또렷할 때 미리 지정해 놓아야 가능하다. 사실 일본은 법이 제정되지 않았지만 존엄사를 허용하고, 우리나라도 작년 10월에야 소극적 존엄사(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것)가 허용됐다.


  저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이유는 자신이 더 살길 바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본인도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봐서 더는 생에 미련이 없기 때문이라 한다. 정말 쿨한 할머니시다. 젊은 시절 전쟁을 겪으며 생사의 고비를 넘겼지만 살아남아 드라마 작가로 많은 돈을 벌었고, 30년 전 사별한 남편과도 의좋게 지낸 듯싶다. 자식도 가족도 없으니, 남은 재산은 노후의 삶을 위해 쓰고, 여행과 운동을 즐기며 지낸다. 솔직히 엄청 부럽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봤으니 더는 미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아흔 살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그녀는 몇 년 전부터 지인의 장례식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 장례식에서 망자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장례식은 남은 자식이나 친척을 위한 행사인데, 자신은 가족이 없으니 그런 최소한의 배려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듯싶다. 나도 이 생각엔 적극 동의한다. 누굴 위한 장례식인가 생각해보면 답이 금세 나온다.     


  저자는 아흔 살의 고령이지만 매일 수영과 근육 운동을 하고 고기를 200그램씩 먹는다. 매년 건강검진을 하고, 혈압강하제를 비롯해 매일 열 가지가 넘는 약을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크루즈 여행을 할 정도로 짱짱하시다. 대외적인 작가 활동은 접었지만 문예지에 이런 글을 기고할 정도로 총기가 또렷하다. 안락사를 바란다면서 매일 건강관리를 지극정성으로 하는 것은, 죽기 직전까진 건강하게 사는 게 존엄한 삶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일리 있는 말이다. 일상생활을 마음대로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태가 되면 삶의 질도 떨어지고, 민폐를 끼친다는 자괴감에 괴로울 것이다. 그녀는 자식과 가족이 없으니 미리 유언장을 작성하고, 물건 정리도 틈틈이 한다고 한다.

    
  평소에 사치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쓸 때는 아낌없이 쓰고, 자식을 위해 돈을 남기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자식도 없지만 세상에서 제일 쓸 데 없는 짓이 부모가 자식에게 유산을 남기는 것이라는 소신을 당당하게 밝힌다. 부모의 재산이 오히려 자녀를 망친 예를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란다. 노후에 자신을 돌봐주는 대가로 자식에게 돈을 남기려는 사람도 있을 텐데, 자식에게 배신당하고 쓸쓸해하느니 차라리 자신을 간병해줄 사람을 고용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나도 자식이 없다 보니 왠지 더) 하는 말마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언젠가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길 원하지만)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권할 생각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다. 나 자신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안락사를 원할 뿐, “나랏돈으로 병원에 가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 안락사를 선택합시다”라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애당초 ‘이 이상 살아봤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나 개인의 심정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이런 생각을 요구받은 적도 없으며 주변 사람이나 사회 역시 절대 이런 입장을 강요해선 안된다.


  이렇게 안락사를 원한다는 저자도 죽음은 두렵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에게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를 때 죽게 도와달라 부탁하고 싶은 심정을 내비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안락사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것인데.




  죽음은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얼마 전에 본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말이다. 누구나 죽기 때문에 삶이 소중하다. 소중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세상에 존재했으면 좋겠다. 나답게 사는 것뿐만 아니라, 나답게 죽는 것이 가능하면 죽음을 조금 더 편안하고 두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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