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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Nov 17. 2018

가면 쓴 범인은 지루하다!

책 <게임의 이름은 유괴> 히가시노 게이고, 2판 2010년

  '히가시노 게이고'란 브랜드를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잊을만하면 찾아본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추리 소설을 많이 쓰는 작가이고,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실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많은 소설 중에 『백야행』과 『용의자 X의 헌신』을 특히 재밌게 봤다. '백야행'은 일본 드라마로 먼저 봤는데, 드라마를 본 후 책을 보니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이미자가 글자에 겹쳐져 곤란하기도 했다. 그래도 원작 소설 역시 드라마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이 책은 나온 지 꽤 오래된 걸로 알고 있는데, 도서관 신관 코너에 있어서 고개를 갸웃하며 집어 들었다. 개정판은 아니고 계속 판을 거듭하여 나온 흔적이 보인다. 얼마나 많이 팔렸기에 그런가 싶어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약간 실망했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백야행'이나 다른 소설에서 받았던 심장 어텍하는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의 방대한 소설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그의 주인공들(주로 사건의 범인)은 캐릭터는 달라도, 살인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분명한 이유를 갖고 있다. 아니, 이유를 넘어 어떤 '소명의식'같은 것이 있다. 어둠 속에 산 건조한 인간의 마음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런 의식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을 이해하게 하고, 공감하게 했다. '백야행'의 료지와 '용의자 X의 헌신'의 이시가미에게는, 그들의 평범하지 않은 행보를 읽는 사람도 따라가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인생을 게임이라 생각하는 사쿠마 슌스케는 깊은 관계를 기피하며 가벼운 연애만 즐기는 개인주의자다. 어떤 게임에서도 진 적이 없다고 자부하는 이 광고기획사 직원은 고객인 대기업 부사장 가쓰라기에게 굴욕을 맛본 후 복수를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가쓰라기 저택에 갔다가 밤에 몰래 담장을 넘는 그 집 장녀 주리를 보고 미행한다. 그녀가 첩의 자식으로 무시받아 가출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쿠마는 기묘한 제안을 한다. 원한이 있는 가쓰라기 부사장을 엿먹이기 위해 둘이서 가짜 유괴 게임을 하자는 것. 돈이 필요한 주리도 흔쾌히 동의하며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사쿠마는 주리의 도움으로 가쓰라기에게 협박 메일을 보내고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경찰의 잠복 수사를 염두에 둔 그는 비상한 머리를 굴려 안전하게 돈을 받아낼 방법을 모색한다. 그 와중에 주리에게 사심이 생기고, 게임의 고수답지 않게 그녀에게 빠져든다.


히가시노 게이고


  사쿠마와 주리가 돈을 받아내고 깔끔하게 헤어지는가 싶었는데, 거기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예상과 다르게 사건은 흘러간다. 자작 유괴극이 싱겁게 끝나지 않아 다행이다 싶지만, 사쿠마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광고주인 가쓰라기 부사장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 하지만, 그만한 일로 이런 위험한 게임을 한다는 게 어이없다. 그의 연애 패턴이나 직장생활을 보면, 집착과 투지 같은 건 없는 스타일이다. 인생을 게임으로 보고, 모든 인간관계를 게임으로 설정해 이기려는 승부욕은 있지만,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는 게 승부욕 때문이라는 건 무리다. 그렇다고 돈이 목적인 것도 아니다. 주리의 몸값으로 받아넨 3억 엔 중 사쿠마가 차지한 건 10% 밖에 안된다. 메일 몇 번 보내고 전화 몇 통해서 얻어낸 돈 치고는 크지만, 굴욕에 대한 복수로 하는 행동치고는 과하다.


  그가 스릴을 즐기고 머리를 써가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자신이 설정한 게임에서 만만치 않은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확실히 이 남자만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주인공들과 달리 내 이해밖에 있다. 그에겐 이 위험한 게임을 해야 할 소명의식이 없다. 재미로 한다 쳐도 설득력이 없다. 주리가 아닌 그가 먼저 제안한 게임에서 드러난 (세상을 게임판으로 보는) 인생관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무모하다. 사쿠마의 캐릭터가 게임에 최적화된  건 맞지만, 그는 에고가 강하고 매우 건조하며 알팍해 보인다.


  그나마 사쿠마가 주인공다운 면모를 보일 때는 그의 철저한 이중적 행태가 드러날 때다. 집에 버젓이 부사장의 딸을 데려다 놓고 있으면서, 회사에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하고 심지어 가쓰라기 부사장과 부딪히기도 한다. 그는 딸이 유괴된 상황에서 회사에 나오는 가쓰라기를 의아해하면서도, 그를 상대로 한 자신의 게임엔 철두철미하게 임한다. 유괴를 모의하고 일을 진행시켜 돈을 받아내는 과정은 교묘하게 설계된 정밀한 미로를 보는 듯했다. 또한 서서히 드러나는 게임의 실체엔 반전 이상의 무엇이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심리는 끝까지 내 심장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청춘의 가면'이라는 게임을 만들어냈고, 실제로 가면을 쓴 듯 속마음을 감추며 산다. 처음엔 그가 가면을 언제 벗을까, 어떤 식으로 실체가 드러날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끝으로 갈수록 이상하게 그의 실체에 관심이 사라졌다. 사실 그에겐 실체라고 할 것도 없다. 그저 비상한 머리로 세상을 게임처럼 사는 놈팡이일 뿐이다. 한 마디로 사쿠마 슌스케라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 오히려 게임을 쥐고 흔든다고 자만하는 그를 장기판 말처럼 굴렸던 가쓰라기 부사장이 끝내 그를 (죽이지 않고) 같은 편으로 포섭하며 세상을 조롱하는데서 낮은 탄식이 나온다.


  작가와 함께 한 게임에서 졌지만, 그다지 억울하지 않은 이 심심한 멘탈은 뭔가 싶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나왔는데, 그건 패스할 생각이다. 원작과 다른 결말이라도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읽지 않은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들은 나를 약간 설레게 한다. 어쨌든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이고, 가독성 높은 문장들은 가끔 일상을 짜릿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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