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스 Feb 28. 2019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면

영화 <Can you ever forgive me?> 2018년

  그녀는 괴팍하고 외골수에다 솔직히 뚱뚱하고 안 예쁘다. 꾸밀 의지도 여력도 없어 보인다. 돈도 친구도 없다. 애지중지하는 고양이와 동거 중인 50대 독신녀 리 이스라엘(멜리사 맥카시 Melissa McCarthy)은 알코올 중독 직전의 작가다. 여기까지 보면 답답하다. 누가 봐도 실패한 인생이다. 한때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자신의 책을 올려놓았던 그녀는 아무도 관심 없는 여자 코미디언의 자서전을 쓰겠다고 힘만 빼고 있다. 담당 편집자도 그녀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다.


한물 간 작가 리 이스라엘


  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남의 자서전을 쓰는 것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아무리 쥐어짜도 할 얘기가 없다. 낡은 아파트에서 고양이와 단 둘이 사는 그녀가 세상에 내놓고 싶은 자신의 얘기가 있을까? 아무도 반기지 않은 출판사 파티에 가서 값나가 보이는 남의 코트나 몰래 들고 나와야 할 만큼 궁핍하게 사는 여자에게 작가의 자존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재능으로 빛나던 젊은 시절은 속절없이 지나갔고, 당장 방세와 공과금을 해결하기조차 버겁다. 사랑하는 연인은커녕 안부를 궁금해하는 친구도 없다. 낡은 책을 팔아도 고양이 병원비도 내지 못한다. 중고책을 팔다 자신의 책마저 허접하게 취급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 지경까지 되면, 작가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을 것이다. 악마와의 거래는 양심이나 인격의 문제이기 전에,  자아를 지키기 위한 작가로서의 마지막 염원이자 생존의 문제가 된다.


담당 편집자에게 무시당하는 리


  리는 우연히 손에 넣은 유명 작가의 개인 편지를 팔아 고양이 병원비를 해결한다. 영혼은 텅 비었지만 글재주와 탁월한 감각을 지닌 그녀는 생존 문제를 해결하고 자존감을 회복할 묘책을 발견한다. 유명인사의 개인 편지를 가짜로 써서 파는 것. 처음엔 고양이 병원비를 지불하고 밀린 방세나 낼 목적이었지만, 그녀가 창작한(?) 유명인사의 편지는 수집가들에게 꽤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뉴욕타임스 목록엔 없지만, 리 이스라엘은 또 한 번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교묘한 비즈니스는 명백한 사기이자 범죄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편지의 진위 여부를 의심한 수집가들이 조사를 의뢰하면서 FBI가 그녀의 사기 행각을 추적한다. 리는 우연히 알게 된 게이 친구 잭 호크(리처드 E 그랜트 Richard E. Grant)에게 대신 거래를 부탁하지만 결국 덜미를 잡힌다.


친구 잭 호크와 함께 위조 편지를 거래하는 리


  리는 재판을 받으면서 작가의 양심을 팔고 범죄 행위를 한 것은 맞지만, 위조 편지를 쓰면서 글로 인정받는 희열을 느꼈기 때문에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일을 할 것이라 진술한다. 악마가 제안한 사기 행각에 자신의 영혼과 재능을 쏟아부은 작가의 말은 궤변 같지만 가식 없는 진심이기도 하다.  


진품 편지를 몰래 훔치는 리


  실존 작가 리 이스라엘(Leonore Carol Israel)이 자신의 사기와 범죄 행위를 회고하며 쓴 책 『Can you ever forgive Me? : Memoirs of a Literary forger』에 뉴욕타임스는 '비도덕적이지만 기막히게 놀라운 책'이라 평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평가는 몰락한 작가 리 이스라엘이 정말로 원했던 찬사이자 낙인이 됐을 것이다. 리는 평생 자신의 얘기를 쓸 명분과 용기를 갖지 못했지만, 악명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낸다.  


위조한 편지를 거래하는 리


  악마와 거래한 작가들은 대게 몸부림 칠 정도로 후회하며 자신의 영혼을 판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양심을 팔고 사기를 치는 건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비난받을 짓이지만,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를 갖게 하기도 한다. 어째서 양심의 가책과 부끄러움이 진솔한 고백과 희한한 명성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추출한 답은 이렇다. 악마는 아무에게나 거래를 제안하지 않는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영혼이 가치 있기 때문에 그와 딜했던 것이다. 작가 리 이스라엘은 명성은 사라졌지만 재능과 감각이 뛰어난 작가다. 유명 인사의 개인 편지를 전문가와 수집가들이 속을 정도로 감쪽같이 위조하는 것은 보통 재주로 하기 힘든 일이다. 그녀의 궁핍과 남다른 재능은 메피스토의 구미를 당겼고, 400개에 달하는 위조 편지라는 딜을 성사시킨 것이다. 그녀가 위조한 편지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거래되고 있을 것이라 한다. 그녀의 이야기가 세상에 퍼져 편지 당사자보다 더 유명 인사가 되면, 위조품의 가치 또한 올라갈 것이다. 거래가 끊이지 않는 '가치'란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악마의 입김이 얼마나 강렬하고 세련되게 들어갔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작가의 책상


  그나마 악마가 딜을 해오는 창작자는 재능이라도 인정받은 행운아 일지 모른다. 세상에서는 아직 인정받지 못했지만, 악마에게는 인정받은 것이니까. 창작자의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의 창조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 더 지옥 같은 고통은 세상에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악마가 작가 리의 양심을 가져간 대신 지불한 대가는 위조 편지의 값어치가 아니라, 리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어 책과 영화로 남을 수 있게 한 아우라가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현실 자매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