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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Mar 04. 2019

자는 조카도 다시 보고 싶게 하는 영화

영화 <떠나기 전에 할 일 Before I Disappear> 2014년

  본 지 오래된 영화를 떠올린다는 건 (조금 과장하면) 전생을 떠올리는 것만큼 아득하다. 6개월쯤 전에 본 영화 「떠나기 전에 할 일 Before I Disappear」은 모든 시간이 밤으로 채워진 드라마다. (정말 그랬던가? 본 지 오래되어 가물거린다. 환한 대낮의 영상을 본 기억이 없는데, 정말 낮 장면이 하나도 없었는지 의심스럽긴 하다. 주인공이 어린 조카를 데리러 학교에 가는 씬은 낮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살하려는 남자 리치


  한 남자가 있다. 서른 안팎으로 보이지만 나이도 출신도 불분명하다. 심지어 외모도 모호하다. 키가 크고 잘 생긴 편이지만 인상이 뚜렷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뒤돌아서면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 얼굴이다. 바에서 허드레 일을 하는 리치(숀 크리스텐슨 Shawn Christensen)는 화장실에서 약에 취해 죽은 여자를 발견한다. 아는 여자이지만 시끄러워질 것을 염려한 업주의 명령으로 조용히 처리한다.  


  지질하다기보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의욕 없이 사는 듯 보이는 리치는 아니나 다를까 자살을 시도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잊지 못해 생을 마감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몇 년 동안 연락 없이 지낸 누나다. 안 좋은 일에 연루되어 경찰서에 구속된 된 싱글맘 매기(에미 로썸 Emmy Rossum)는 자기 딸 소피아(파티마 파섹 Fatima Ptacek)를 학교에서 데려와 하룻밤 봐달라고 부탁한다.


리치와 누나 매기


  죽으려던 남자는 마지못해 자살을 미루고 생전 처음 보는 조카를 데리러 학교에 간다. 불행한 남자 리치의 뜻밖의 하룻밤은 예상대로, 혹은 예상을 뛰어넘어 기묘하게 흘러간다.


  시니컬한 애어른 소피아와 삶이 지겨운 남루한 청년 리치는 서로를 낯설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한다. 리치는 바 화장실에서 죽은 여자 때문에 옛 친구 기데온(폴 웨슬리 Paul Wesley)에게 불려 간다. 죽은 여자가 기데온의 여자 친구였던 것이다.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는 도시의 밤거리와 술집은 소피아를 데리고 다니기엔 몹시 위험하다. 리치는 어린 조카가 걱정되지만 살면서 얽혔던 인연 때문에 아이와 함께 밤새도록 이리저리 다닐 수밖에 없다. 몇 시간 전에 누나의 전화를 안 받았다면, 그래서 예정대로 온전히 목숨을 끊었다면 감수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서로 못 미더워했던 조카와 삼촌은 밤새도록 위험한 여정을 함께 하며 (예상대로) 어느새 서로를 의지한다.


처음 함께하는 리치와 조카 소피아


  리치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그녀가 없는 세상을 견딜 수 없어 죽으려 한다. 사랑 없는 삶을 못 견뎌하는 젊은이는 나약해 보이지만, 그 괴로움과 상실감이 죽음 못지않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사라진 사랑의 자리를 채워준 것은 또 다른 사랑이다. 물론 그가 잃었던 이성적인 사랑은 아니다. 깊이 드러나진 않지만 과거의 상처 때문에 소원했던 누나와의 관계 회복, 그리고 존재조차 몰랐던 조카에 대한 애정이 그를 변화시켰다. 죽으려 했던 남자에서 살고 싶어 하는 남자로.


  새삼 가족의 사랑을 찬양하고 싶진 않다. 매기와 소피아가 리치를 변화시킨 건 맞지만, 그 변화의 에너지가 꼭 혈연의 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리치가 세상의 어두운 밤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보냈던 게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비록 뜻밖의 하룻밤일지라도.


  리치의 밤은 어둡고 위험하다. 술과 마약,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위태로운 시간은 멀쩡한 젊은이를 병들고 지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불안하고 무기력한 사람에게 삶의 의욕을 빼앗는다. 리치는 자살로, 기데온은 위협과 협박으로 상실감을 표출한다. 잃어버린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도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고 사는 것은 사랑을 대신할 만한 보람을 찾기 때문 아닐까. 먼저 세상을 떠난 여자 친구는 (설사 다른 사랑이 나타난다 해도) 영원히 대체할 수 없지만, 조카와 함께 하며 느끼는 책임감과 애정,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누나에 대한 우정은 살아갈 이유가 될 수 있다. 최소한의 의리와 책임감만으로도 쉽게 죽지 못하게 붙잡는 게 가족이니까. 가족은 그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저버리지 못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어 강한 존재라 생각한다. 그 강인함이 꼭 피를 나눈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기데온


  이 영화는 주연이자 감독인 숀 크리스텐슨의 단편 영화 「Curfew 야간 통행금지」를 장편으로 만든 영화다. 아카데미 단편 영화상을 받은 뛰어난 작품이 장편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단편을 먼저 보고 이 영화를 보면 더 재밌다고 하는데, 단편은 보지 못했다. 솔직히 가족의 사랑과 정을 느끼기엔, 이 영화는 너무 어둡고 개인적이다. 주인공과 조카의 관계가 흥미롭긴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기데온을 연기한 폴 웨슬리다.


폴 웨슬리


  미드 시리즈 《뱀파이어 다이어리》의 고뇌하는 선한 뱀파이어 '스테판 살바토레'가 기데온으로 나와서 '오잉?' 했다. 뱀파이어에는 못 미치지만 폴의 임팩트는 여전하다. 주인공 얼굴은 가물가물해도, 조연으로 나온 폴의 얼굴은 쉽게 잊을 수 없다. 희미한 여운이 아쉬워 이 영화를 한 번 더 보게 된다면, 그건 100% 폴 때문이다. 《뱀파이어 다이어리》시리즈를 다시 볼 엄두는 안 나지만 영화는 한 번 더 보고 싶다. 잠시 보고 잊기엔 그의 아우라는 너무 강렬하다. 귀여운 조카들 얼굴도 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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