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스 Mar 06. 2019

형사가 천직인 배우 VS 배우가 천직인 형사

영화 <암수 살인> 2018년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다닌다.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침에 억지로 눈 뜨는 사람도 많다. 형사들은 어떨까. 직접 본 기억은 없다. 아마 길에서 봤어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직접 대면은 못했지만, 형사는 드라마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업군 중 하나다. 흉악범을 쫓아 숨차게 달리고, 고된 잠복근무와 위험한 몸싸움도 불사하는 그들은 정의의 사도 같지만 온갖 협잡과 비리의 온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형사는 굳이 말하면 이 사회의 필요악이다. 처절한 악을 응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들이 없어도 유지되는 사회가 이상적으로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형사 김형민과 살인범 강태오


"일곱, 총 일곱 명입니다. 제가 죽인 사람들예."


  여자 친구 살해범으로 수감된 강태오(주지훈)는 메마른 중년 형사 김형민(김윤석)에게 과거 자신이 행한 여섯 건의 추가 살인을 자백한다. 피해자는 있지만 신고도 시신도 수사도 없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살인 사건, 즉 암수 살인이다. 자신을 믿는 형민을 이용해 기소된 살인 사건을 증거 불충분으로 만들어 감형받으려는 목적이다. 무슨 살인범이 거기까지 계산하고 위험한 도박을 할까 싶지만, 그의 계획대로 형민이 찾아낸 진짜 증거 덕분에 이미 기소된 사건은 (다른 형사들에 의한 증거 조작으로) 감형된다. 이 일로 형민은 형사들의 미움을 받지만, 강태오의 범행 진술이 사실임을 직감한다.


형민에게 추가 살인을 진술하는 강태오


  사람 죽인 일을 무용담처럼 신나게 진술하는 강태오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다. 거짓과 진실을 교묘하게 혼합해 형사를 가지고 노는 태오에게 형민은 끌려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놈을 믿고 개인 돈까지 털어 거액의 영치금과 선물을 주는 형민은 건조하지만 좀 답답해 보인다. 사이코패스를 믿고 수사에 매달리는 형사는 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 것일까.



"이거 못 믿으면 수사 못한다. 일단 무조건 믿고, 끝까지 의심하자."


  형민이 바라보고 믿는 것은 강태오의 입과 그가 쏟아놓는 말뿐이다. 그의 한마디에 돈을 대주고, 자꾸 오락가락하는 살인범의 비위를 맞춰가며 증거와 사건을 파헤친다. 동료 형사는 그를 무시하거나 비웃고, 일부 피해자 유가족들 조차 형민의 탐문에 차갑게 응수한다. 형민은 형사라는 직업인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 이상으로, 사재까지 털어가며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살인 사건에 목맨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할까 의문이 들 정도다. 물론 수사 대상도 되지 못한 억울한 죽음을 해결하려는 마음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형사의 직업적 소명만으로, 살인범에게 영치금까지 대주며 진술을 받아내고 증거를 찾는 의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강태오의 진술을 토대로 암수 살인을 조사하는 김형민 형사


산 하나를 파헤쳤지만 살인의 증거인 시신은 나오지 않았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형사와 살인범의 관계가 실제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건조하고 무심하게 사이코패스를 대하면서도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김형민 형사는 무척 인상적이다. 그의 캐릭터가 강해서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탐문하거나 증거를 찾아다니는 진짜 형사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형사를 본 적도 없으면서 김윤석 배우가 연기하는 형사를 진짜 형사 같다 느끼는 것은 배우의 힘일까 형사의 힘일까. 강태오로 분한 주지훈 배우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불허전이다. 더 언급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그의 연기는 극에 몰입하게 하는 핵심으로 작용한다.


  김형민 형사는 잔인하고 억울한 죽음의 사연에 귀 기울이지만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피해자의 입장에 몰입해 격해지긴 쉬워도 냉정해지긴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대신 포기하지 않은 집념과 노련한 촉으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왠지 진짜 형사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메마른 눈빛으로 용의자와 희생자를 동시에 냉정하게 볼 것만 같은데, 김윤석 배우가 딱 그런 느낌이다. 그런 냉정함과 이성적 사고가 결국 놓치기 쉬운 단서를 찾아내 사건을 해결한다.


살인 사건 현장 검증하는 형사와 피의자


  김윤석 배우는 다른 영화에서도 형사를 연기했었다. (당연하지만) 형사마다 각각 다른 캐릭터인데, 하나같이 어딘가에 돌아다니고 있는 진짜 형사 같다. 특히 이 영화 속 김형민 형사처럼 '형사가 천직인 듯한 배우'는 익숙하면서도 좀 특별하게 보인다.


  김형민이 특별한 것은 강태오와 게임하는 것처럼 위장했지만, 처음부터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강태오는 명백히 김형사와 게임을 즐겼다. 형민에게 당당하게 영치금을 요구하고 진실과 거짓을 반복해 쏟아놓는 것도 게임의 일환이었다. 김형민이 그의 룰에 따라 움직이는 체스판의 말처럼 보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한마디에 산 하나를 파헤친 것도 강태오를 게임의 승자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김형사는 애초에 그 누구와도 게임할 마음이 없었다. 그에게 암수 살인사건은 해결해야 할 형사로서 소명일 뿐이다. 사이코 살인범과 두뇌 게임을 한 것도 아니고, 내기를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증거를 찾기 위해 개고생을 하고, 수사에 난항을 겪어도 묵묵히 자신의 감을 믿고 앞으로 나간다. 감방에 앉아 한치도 못 나가는 강태오는 마치 김형사를 쥐고 있는 말처럼 조종하지만 결국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형사는 애초에 살인자와 게임할 마음이 없으니 질 수가 없다. 김형민의 건조하고 덤덤한 집념은 김윤석 배우의 메마른 눈빛과 상반되게 의외로 폭발적이다. 그가 강태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교묘하게 조정했더라면, 이 게임은 짜릿했을지 몰라도 리얼리티가 떨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 돌아다니는 범인을 잡는 진짜 형사는 그저 열심히 뛰고 치열하게 탐문해 증거를 찾는, 직업에 충실한 덤덤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우리 곁의 형사들은 괴력으로 범인을 때려잡는 히어로도 아니고, 기막힌 촉만으로 수사하는 판타지 주인공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김윤석 배우는 형사가 천직인 배우이자 배우가 천직인 형사 같다. 『추격자』의 전직 형사도, 『극비 수사』의 성실한 옛날 형사도 캐릭터는 다르지만 세상 어딘가에 있을 법한 형사들이었다. 아직 세상에 없는, 그가 연기할 또 다른 형사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왠지 빨리 보고 싶다, 그분들을.


매거진의 이전글 자는 조카도 다시 보고 싶게 하는 영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