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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Mar 15. 2019

어쩌면 그린치는 관종일지도

영화 <The Grinch> 2018년

  크리스마스에 보라고 만든 영화를 일부러 크리스마스가 훨씬 지나서 봤다. 영화 한 편 본다고 썰렁한 시간이 더 훈훈해지는 것도 아니고, 주제가 한결같은 그런 영화들은 언제 봐도 적당히 지루하면서 따뜻하다.  


그린치와 집사 맥스


  눈을 찌를 듯 강렬한 연두색 털로 온몸이 뒤덮인 그린치는 크리스마스를 혐오하는 대표적인 캐릭터다. 인간계에 스쿠루지가 있다면, 비인간계엔 그린치가 있다. 우리에겐 스쿠루지보다 덜 알려지긴 했지만, 영미권에선 그린치가 꽤 유명한 캐릭터라고 한다. 영화에서 밝혔듯 50세 넘어서까지 짱짱한 걸로 봐서, 반세기 넘게 안티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독보적인 존재로 살아남은 듯싶다.


후빌 마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후빌 마을 사람들은 성탄절 준비로 바쁘다. 산속 동굴에 사는 그린치는 웬만하면 크리스마스 시즌엔 마을에 안 내려오는데, 먹을 게 똑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장 보러 내려온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설레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자 그의 몹쓸 심통에 발동이 걸린다.


"크리스마스를 훔치겠어!"


  그린치는 만능 집사인 강아지 맥스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산산조각 낼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 썰매를 훔치고 루돌프까지 섭외한 후 자신이 산타로 변장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마을로 내려가 선물을 몽땅 훔쳐내겠다는 것. 철저한 계획과 시뮬레이션을 거쳐 그린치는 그 어려운 걸 진짜 해낸다. 이브 밤에 마을을 돌며 한 집도 빠짐없이 트리와 선물을 몽땅 훔친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어난 마을 사람들은 썰렁한 거실을 보며 망연자실해하고, 그린치는 혼자 의기양양해한다. 그런데, 절망할 줄 알았던 마을 사람들은 모여 캐럴을 부르며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기뻐하며 서로를 축복한다.     


크리스마스를 훔칠 계획을 하는 그린치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누군가 물건을 훔쳐간 것이지 크리스마스를 훔친 게 아니라는 걸. 크리스마스는 누가 훔치고 말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 그린치가 혐오하는 것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외로움이다. 평상시보다 들뜨고 다 같이 모여 기뻐해야 할 명절은 심통 맞은 외골수에겐 치명적인 고립의 시간이다. 어릴 때 혼자만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받지 못하고 외로움에 사무쳤던 그린치는 자신만 빼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에게 적의를 품고 크리스마스를 훼방 놓는 걸 자신의 캐릭터로 삼은 것이다.


훔친 썰매를 타고 마을로 가는 그린치


  트리와 선물이 사라졌어도 손을 잡고 캐럴을 부르는 마을 사람들은 그린치에게도 따뜻한 인사를 건네며 손을 내민다. 심술 맞게 생겼어도 은근히 마음 약한 그린치는 그들에게 선물을 돌려주고 파티에 참석한다. 생전 처음 초대받은 파티다.


  그린치는 좀 밉상이고 심술궂긴 해도 사악하진 않다. (진짜 사악했다면 어린이들에게 사랑받으며 50년 넘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공공연하게 크리스마스가 제일 싫다고 하는 것은, 크리스마스에 혼자 있는 게 두렵고 싫다는 말이다. 진짜 크리스마스가 싫다면 눈과 귀를 틀어막고 이틀 동안 잠만 자면 된다. 그러면 크리스마스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다음 크리스마스까지 심통 부릴 일도 없다. 그렇게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그는 개고생 하며 썰매를 훔치고 루돌프를 찾아 헤맨다. 하룻밤 동안 마을의 집을 전부 돌며 트리와 선물을 훔쳐내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짜고, 시간을 계산해가며 시뮬레이션까지 하는 등 철두철미하게 준비한다. 그리고 정말 잠도 안 자고 맥스와 함께 어마어마한 물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가져온다. 보통 부지런해서는 이런 짓 못한다. 나 같으면 귀찮고 힘들어서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괴팍한 심통쟁이 그린치와 집사 맥스


  그린치는 심드렁하게 굴다가 크리스마스를 훔칠 생각을 하자 온몸에 생기가 돌며 활력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바쁘고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위험도 무릅쓰고 모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방법이 다를지 모르지만, 그린치는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누구보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려온 게 아닐까?


  물론 외롭게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게 싫다면, 마을 사람들을 친절히 대하고 파티에 초대받을 수도 있다. 선량한 후빌 마을 사람들은 그린치를 매몰차게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임팩트는 없다. 그린치가 마을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끌길 원했다면, 크리스마스를 깡그리 훔치는 일보다 더 충격적이고 강렬한 못된 짓은 없다.


마을 아이에게 못되게 구는 그린치


  50이 넘은 사람이 갑자기 캐릭터를 바꾸고 개과천선한 척하는 것은 쉽지 않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아도 무뚝뚝한 사람은 평생 그 캐릭터를 고수하는 게 편하다는 선입견과 타성에 젖어 산다. 그린치는 자신이 외롭다는 걸 인정하기 두려워서 더 못돼게 심술을 부린다. 그런 사람에게 왜 좀 더 상냥하지 못하냐고 다그치면 엇나갈 뿐이다. 그는 자기 혼자 외로운 게 두려워 다른 사람들의 행복도 빼앗겠다는 만행을 저지르지만, 그의 철없는 행동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지 못한다. 그린치의 발악과 몸부림은 어쩌면 나 좀 봐달라고, 나도 여기 있다는 절박한 시그널일지도 모른다. 착한 사람들은 비난과 멸시 대신 너그러움으로 그린치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후빌 마을을 보는 그린치


  그린치가 은연중에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다면 그는 확실히 성공했다. 철저한 계획과 민첩한 기동력, 50년 넘게 쌓아온 분노의 에너지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그를 동굴 밖으로 끌어냈다. 혼자 칩거하는 사람이 벌이는 만행은 때로는 순수한 악이기보다 관심 끌고 싶어 하는 못된 짓일 수도 있다. 아이가 하는 거짓말이 나쁜 짓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무관심한 엄마의 주의를 끌고 싶은 게 목적일 수도 있듯이 말이다. 그린치야 말로 혼자만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어린 시절, 그 외로운 초록 꼬마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아이다. 관심과 애정은 못돼 처먹고 괴팍한 관종을 진짜 어른으로 만드는 소중한 자양분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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