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Big Brother> Lionel Shriver장편소설, 2015
섭식 장애 예방 및 근절을 목적으로 하는 비영리 단체의 정언이 담긴 이 소설은, 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버(Lionel Shriver)가 초고도 비만 환자였던 친오빠를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비만'은 개인적 문제인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며, 인간의 생존과 사회적 관계, 미디어의 영향과 생명 윤리, 현대 식품 산업의 폐단이 얽혀있는 매우 복잡한 이슈다.
40대 초반의 판도라는 7년 전, 이혼남 플레처와 결혼해 그의 십 대 아이들 둘을 키우며 사는 주부다. 유명해지거나 돈을 많이 벌겠다는 야망은 없었지만, 장난처럼 시작한 사업(사람의 특징적인 말투를 흉내 내는 인형 '베이비 모노토너스'를 제작하는 회사)이 꽤 성공해 아이오와에서 중산층으로 살고 있다.
그녀는 뉴욕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로 일하는 오빠 에디슨이 집세도 못 내고 친구들 신세를 지고 있다는 소식에 그를 집으로 초대한다. 공항에 마중 나간 판도라는 4년 만에 보는 오빠를 알아보지 못한다. 무려 175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초고도 비만이 된 에디슨을 본 플레처와 아이들 역시 깜짝 놀란다.
플레처는 약물 중독인 전처와 이혼 후 저염식과 운동으로 몸 관리를 철저히 하는 완벽주의자다. 그는 무너진 자아와 무절제한 식생활의 증거인 듯 보이는 육중한 몸뚱이를 지닌 처남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는데, 에디슨이 마구 먹어대고 어지르며 심지어 그가 만든 가구까지 망가뜨리자 분노를 터뜨린다. 플레처는 아내에게 처남을 빨리 돌려보내길 종용하지만, 판도라는 어린 시절 자신의 절친이자 우상 같았던 오빠의 처참한 모습에 고통과 책임을 느끼며 어쩔 줄 모른다.
판도라는 빈털터리에 일자리도 잃고, 거대한 지방 속에 눈치마저 감춘 듯한 오빠를 차마 내쫓을 수 없다. 돈을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런 식으로 몇 푼 쥐어주고 매정하게 뉴욕행 비행기에 태우면 에디슨은 또 몇 달 동안 무절제하게 먹으며 생명을 단축시킬 것이다. 가족의 안락을 위해 오빠와의 신경전을 피하고 눈 감아 버리면, 비겁하지만 편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에디슨을 모른 척한다면, 그가 천천히 죽어가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결국 판도라는 일시적으로 집을 나와 오빠와 단둘이 지내며 그의 다이어트를 돕기로 결심한다. 플레처는 성인인 오빠를 책임지려 하는 아내의 생각이 비상식적이라며, 가정 붕괴까지 들먹이면서 자신과 오빠 중 한 명을 택하라고 윽박지른다. 판도라는 1년 동안 나가서 살겠다고 선언하고, 동네에 작은 집을 얻어 에디슨과 동거하며 그의 혹독한 다이어트 감독관이 된다.
이 소설은 음식과 먹는 행위를 중심에 놓고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개인과 가족, 사회적 관계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와 사유로 채워져 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인 먹는 행위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기능적 행위가 아니다. 무엇을 먹는 행위는 개인의 욕망과 자아를 표출하고 사회적 관계와 삶의 태도까지 드러낸다. 무절제한 섭식으로 고도 비만이 된 사람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내면과 사회관계 속에 형성된 굴곡이 먹는 행위에 고스란히 반영돼 심각한 신체 상태와 비주얼로 문제를 환기시킨다. 그들의 정신적 사회적 절망은 생존 문제로 직결된다. 여기에 더해, 비만 환자를 바라보는 가족들은 책임감과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4년 동안 못 본 오빠가 100킬로그램이나 불어 나타나자 판도라는 충격보다 죄책감을 더 뼈저리게 체감한다. 왜 그동안 오빠를 안 보고 살았을까. 전화로 연주 투어를 다니느라 바쁘다는 허풍을 왜 믿었을까. 지금 눈 앞에서 부엌을 마구 어지르며 쓸어 담듯이 식재료를 해치우는 오빠에게 어째서 그만 먹으라고 말리지 못하는 걸까.
"그는 단단히 팔짱을 끼고 턱을 쇄골에 파묻어 삼중턱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눈꺼풀에 힘을 잔뜩 주어 실눈을 떴다. 그의 가장 내밀한 자아는 공처럼 단단히 뭉쳐져 널찍한 지방의 보호막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그가 자신을 충분히 작게 만들 수도 없고 적대 세력으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했다고 느낄 만큼 수비 구역을 충분히 늘릴 수도 없다는 것을 나는 감지했다. 순전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욱 빠르게 살을 찌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 그는 내가 후진해서 진입로를 빠져나갈 무렵 포크 라인드를 뜯어 팽팽하게 내민 입술 속으로 쑤셔 넣고 보복이라도 하듯 발포 단열재 씹는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 보복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나 할까 궁금했다."
뚱뚱한 사람 앞에서 살 얘기를 하거나 불쾌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은 문명사회의 금기다. 장애인을 대놓고 빤히 쳐다보지 않듯이, 비만인이 먹는 모습을 흘끔거리지 않는 것은 에티켓이고 상식으로 통용된다. 예의와 배려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나의 가족이나 친구의 경우가 되면 양상이 달라진다. 가만히 놔두는 것만으로도 죽어가는 걸 방치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인간이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며 체내에 지방을 축적하는 행위는 매우 내밀하고 사적인 프라이버시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혹은 건강을 해치거나 보기 안 좋다고 해서 나의 기준과 견해를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지 않나...) 그렇다고 마냥 사람 좋은 미소로 마치 그 많은 살들이 안 보인다는 듯 구는 것은 또 다른 양심의 가책이 된다.
성인이 되어 각자 가정을 가진 (한때 가족이었던) 혈연관계에선 대체 어디까지 간섭하며 (사랑이란 이름으로) 구속하는 게 가능할까. 어느 선까지 책임을 다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걸까. 꽤 신랄한 주제를 다루지만, 이 이야기는 매우 유머러스하다. 따뜻한 미소와 냉소를 오가는 문체는 (꼭 비만 문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부딪치게 마련인 가족에 대한 책임과 희생의 한계와 범위를 생각하게 한다.
한 사람의 비만으로 야기된 문제의식은 단지 건강과 생존, 식비와 체면의 문제가 아니라 훨씬 더 광범위하고 깊게 한 가족과 지역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절망한 개인이 선택한 폭식의 폐해보다 더 심오하고 고통스러운 살을 빼는 과정은 인간의 또 다른 한계를 경험하게 한다. 죽음보다 달콤한 음식의 유혹 앞에서 사람은 몇 년의 생명을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포기하기도 한다. 먹으면 죽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몇 걸음 못가 숨이 차고 이성에게 어필할 수 없으며 무기력하고 짜증 나는 나날이 죽을 때까지 이어질 걸 알면서도, 도넛과 피자가 주는 단말마의 위안 때문에 인생을 통째로 포기한다. 폭식의 메커니즘은 절망한 인간을 위로해준다고 꼬셔놓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음식은 본질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먹을 것'은 만족의 '느낌'을 주는 것으로, 실체라기보다는 개념이다. 그것은 만족 자체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다이어트가 종교나 정치적 열성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맛에 저항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음식 그 자체로는 보상을 얻을 수 없어서 더 먹는다.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경험은 한 입을 먹고 난 후와 다음 한 입을 먹기 전의 경험, 즉 방금 전에 먹은 한 입을 기억하고 곧이어 먹을 또 한 입을 고대하는 일이다. 실제로 먹는 부분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먹는 낙이 그토록 애를 태우는 동시에 그토록 위험한 것이 되는 이유는 이렇듯 계속 갖고 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판도라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최초의 여성으로, 인간을 (특히 남자를) 벌하기 위해 제우스가 만든 여자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판도라는 어릴 때부터 평범하고자 했으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TV 연기자인 아버지 때문에) 평범하지 못했었다. 아버지의 유명세를 조롱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며 이용했던 오빠와 달리,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일상을 누리고 싶어 했다. 그런 그녀가 뜻밖에 사업가로 성공해 부를 쌓고 이름을 날리는 동안 오빠는 좌절하며 살을 찌웠다. 재혼한 후 직장을 때려치우고 (돈이 안 되는) 수제 가구를 만드는 남편과 그의 아이들까지 부양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강요된 선택지와 윽박, 가족에 대한 죄책감뿐이다. 판도라가 어떤 선택을 해도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괴롭다고 아우성칠 것이다. 이 모든 걸 왜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지 답답할 지경이다. 오빠가 살찐 것도, 남편이 결혼 생활에 위기를 느끼는 것도, 허세에 절어 학업을 중단한 양아들도 모두 그녀의 죄책감에 매달려 있다. 어쩌면 신화 속 판도라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들을 괴롭혀야 하는 운명에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 끝의 반전은 허탈하지만 나름 속이 뻥 뚫리게도 한다. 판도라는 그녀만이 열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원래는 '판도라의 항아리'라고 한다)를 열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무척 고심했을 것이다. (그녀가 아니라 작가가 한 것이겠지만.) 홀딱 뒤집어지는 결말은 씁쓸하지만 현실적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섭식 행위를 통해 죽음을 재촉하기도 한다. 배가 부르면 멈추는 다른 동물과 달리, 사람은 ‘폭식’이라는 자기 파괴적 기만행위를 심심찮게 저지른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주체적 선택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어쨌든 매우 일상적인 이 행위는 누가 누구를 위해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랑과 책임으로 가족 중 하나가 희생한다고 해도, 당사자의 내면에 절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폭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완치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피곤함과 절망, 인내와 극복 같은 인생의 필수 코스를 거의 매일 반복해서 겪는다면 탄수화물과 지방은 강력한 유혹이 될 수밖에 없다. 달고 맵고 짠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당장 뇌가 반응해 호르몬을 분비하고 긴장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장착된 이 생체 메커니즘이 어쩌다 인간을 천천히(누군가에게는 매우 빠르게) 죽이는 장치가 됐는지 모르겠다. 식료품이 풍부해진 현대 사회에 사는 한,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음식을 절제하며 싸우다 결국 해치우길 반복할 것이다. 이 싸움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외로운 전쟁이다. 내가 만든 또 다른 자아, 내 몸을 해치는 잉여 지방과 살을 떠나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성인이 된 남매가 치열한 전우애를 발휘해 치르는 '살과의 전쟁'은 어떻게 사느냐가 어떻게 죽느냐를 결정한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