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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Mar 04. 2019

결코 사소하지 않은 부탁

책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난다, 2018년

  앗! 이럴 수가. 황현산 선생님이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작년 12월과 올 1월에 걸쳐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을 읽을 때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책 표지 안쪽에 실린 저자에 대한 설명엔 생몰 연대가 나와있지 않았고, 이 분의 명성에 비해 나는 매우 게으르고 무지했다.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인 황현산 선생님의 산문집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어떤 매체에 기고한 칼럼 형식의 글과 문학평론가인 저자의 정체성과 소신을 담은 글을 품고 있다. 이 분의 첫 번째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도 벼르기만 했지 아직 읽지 못했다. 비록 딱 한권만 읽었지만, 이 분의 새 책이 다시 나오지 않는다 생각하니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먹먹하다. 진작 많이 읽고 알아둘 걸 싶다. 도서관에 (하도 많이 대출되어) 너덜너덜해진 채 눈에 띄었던 『밤이 선생이다』가 떠오른다. 저 책을 왜 그렇게 많이 빌려갈까, 하면서도 나도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자꾸 미뤘다. 굳이 대출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사서 보면 될 것을. 황선생님이 번역한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도 읽었지만, 좀 오래되어 그런지 내용이 별로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읽을 당시에는 매우 인상적이라며 감탄까지 했었는데, 어째 이렇게 가물가물한지 모르겠다. 보들레르의 잘못도 아니고 번역자의 잘못도 아니다. 순전히 무식한 내 탓이다.


황현산 작가


  저자는 세상을 떠났어도 책은 남아있으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왠지 그분이 살아계실 때 읽지 못한 것이 죄송하다. 저자와 글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시대를 통찰하는 좋은 글은 좋은 사람을 상상하게 한다. 이 책의 저자가 그렇다.


  저자는 아버지 연배이신데 글에 나타난 생각과 이상은 흐트러짐 없이 맑고 정결하다. 시대를 관찰하고 고민하는 방향도 내가 지켜보는 방향과 거의 일치한다. 불문학 번역가나 문학 평론가로서의 업적도 훌륭하지만 세상을 바라보고 개탄하며 내는 목소리는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답다. 몇 년 전 과거이긴 하지만 이 책에 담긴 글을 읽다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다방면으로 촉수를 뻗은 듯한 저자의 관심과 통찰은 한 사람의 어른이 사라지면 도서관 하나가 불탄 것과 같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흉악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형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기에 우리의 패배를 증명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흉악범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일상이기 때문이다. (2013. 7. 20.)
―「그의 패배와 우리의 패배」 중에서



예술도 밥을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 밥벌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직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논의를 좁혀 문학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문학 관련 학과를 졸업한 많은 작가가 출판계나 문화 관련 직종에서 직장인으로 생활하기도 하지만, 한 문인이 취직을 하지 않는다면 그가 작가로서 성공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글쓰기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교수직을 그만둔 작가도 많다. 그들이 자기 모교에 불명예를 안겼는가. 대통령이 어디선가 가수 싸이를 창조경제의 모범으로 꼽았다는데 싸이가 4대 보험 직장인인가.
나는 창조경제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창조를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정장을 하고 4대 보험 직장에 출근하는 것만이 취업이 아니란 것을 아는 것이 창조의 시작이다. (2013. 12. 7.)
―「예술가의 취업」 중에서


악마는 눈뜨고 그 생때같은 아이들을 잃는 순간에도 우왕좌왕할 정부를 기다려 배를 침몰시켰다. 아이들을 다 구했다는 유언비어를 책임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뜨리기도 했다. 악마는 빠뜨린 것이 없었다.
물론 나는 악마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악마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악마만이 저지를 일을 이 땅의 사람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악마의 처사였다면 악마의 연구로 끝날 텐데, 그것이 우리의 죄이니 우리는 이제 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나 자신을 용서하지 말고 리본을 달건 촛불을 들건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 (2014. 5. 3.)
―「악마의 존재 방식」 중에서





  사실 연장자라는 이유로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주장엔 상당한 거부감이 든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고 싶지만 강제로 주입하면 불쾌하다. 나와 생각이 달라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의견이라면 경청할 수 있다. 어른의 목소리로 어른다운 생각을 내비치면서도 강요하지 않은 합리적인 의견은 존경을 품게 된다. 이 분의 글처럼 말이다.


  저자의 글을 보면, 문학을 하는 일은 세상을 관찰하고 나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했던 프랑스 문학 작품 연구와 번역은 남의 나라 문학에 매몰되어 산 흔적이 아니라, 세상의 한 부분을 이 나라에 소개해 후학들에게 넓은 안목을 갖게 하고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 일이었다. 저자의 짧지만 단호한 글은 이 시대를 산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고 대변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부탁은 결코 '사소한 부탁'이 아니다. 그의 글은 함부로 잊거나 지나칠 수 없는 무겁고 진지한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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