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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pr 09. 2019

말랑말랑한 힘

책 <말랑말랑한 힘> 함민복 시집, 문학세계사, 2005년

뱃길은 아무리 다녀도 다져지지 않습니다. 굳은살 하나 없는 말랑말랑한 생살로 된 길입니다. 먼지가 나지 않는 길입니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물고기가 다니는 길을 쫓아다니는 길이니 물고기가 만들어준 길이기도 합니다.


  보통 시집 뒤에는 문학평론가나 비평가의 해설이 달려 있다. 시를 읽으며 떠오른 이미지나 상징은 그것대로 두되, 친절하지만 다소 현학적인 해설을 바탕으로 다시 보면 내가 몰랐던 혹은 놓쳤던 의미가 한결 선명하게 잡힌다. 그러면서도 시를 읽는 감정 노동에 더해, 해설까지 읽는 것 또한 노동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시라는 것이 어차피 읽는 사람 마음에 비친 이미지 아닌가. 요즘 시가 그런 건지 내가 무식해서 그런 건지, 어떤 시는 해설을 읽고 다시 보면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의미와 해석에 뜨악할 때도 있다.


  모처럼 뒤에 해설이 없는 시집을 발견(?)했다. 『말랑말랑한 힘』은 10년 전에 사서 읽고 책장에 모셔뒀다가, 우연한 계기로 다시 꺼내 본 함민복 시인의 시집이다. 제목은 뭔가 따뜻하고 아기자기한데, 바다와 접한 섬마을에 사는 남자의 심성이 담긴 시들은 청량하고 푸근하다. 시들 뒤에는 시인이 직접 쓴 편지(?)가 있다. '섬이 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글의 제목은 따로 있다.


섬이 하나면 섬은 섬이 될 수 없다


  태양 - 포구 - 뱃길 - 그물터 - 귀항


  편지의 순서에 따라 나눈 단락의 부제는 단순하고 소박한데, 글은 결코 소박하지 않다. 섬마을의 일상과 자연 그리고 생생한 노동은 그곳에 살지 않는 사람들의 얕은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원시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다. 그렇다고 거칠고 난폭한 것은 아니다. 낭만적이거나 목가적이기만 한 것도 않지만. 강화도에 사는 시인이 담담한 어조로 담아낸 섬마을의 일상을 시들 뒤에 첨부한 것은, 나의 시는 이런 삶에서 나온 것이니 무슨 해석이고 나발이 필요하겠냐는 단호한 후일담 같다. 사실 그의 시는 읽는 동시에 푸른 바다와 평야가 펼쳐지고, 고된 노동이 시작되며, 꽃과 열매와 태양과 짐승들이 어우러진다. 개밥그릇마저 시가 되어 꿈틀댄다.


개밥그릇을 말갛게 닦아주고 싶었다

부처님 오신 날인데 나도

수돗가에 앉아 도(陶)를 닦았다

고개 갸웃갸웃 쳐다보던 흰 개


없다니까!

그 그림자가 그릇의 맛이야

수백 번 혓바닥으로 핥아도 아직 지울 수

햇살이 담길수록 그릇이 가벼웠다


  예전에 읽은 시인의 에세이에서, 장가 못 간 노총각의 허전하지만 담담한 심정을 많이 느꼈는데 그 사이 시를 가르치는 강좌에서 만난 제자와 느지막이 결혼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강화에서 아내와 인삼 가게를 한다는데, 그런 소식마저 거의 10여 년 전이라 지금도 가게를 계속하는지 모르겠다. 시만 쓰면 생활이 안돼 인삼을 파는 시인이 생활 걱정 없이 시 쓰는 삶을 아직까지 잘 이어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긍정적인 밥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이 시집이 아닌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 담긴 시다.


  내가 왜 이 시인을 잊을 만하면 찾는가 했는데, '긍정적인 밥'이 주는 맑고 따뜻한 느낌 때문이다. 안타깝고 서글픈 현실을 누추하지 않게 써 내려간 이 시는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시「너에게 묻는다」) 만큼 뜨끔하면서 훈훈하다. 시인의 가난과 일방적인 희생이 문학하는 사람의 인지상정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시인이 이런 시를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애써 긍정적이 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현실이 나아졌길 바라지만, 왠지 2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다른 시인의 말처럼 존재 자체가 축복인 함민복 시인은 오래오래 지치지 않았으면 싶다. 이런 희망 자체가 헐값에 감정노동을 하라는 것 같아 좀 그렇지만, 시인의 말대로 '말랑말랑한 힘'은 따뜻하고 강하고 오래간다. 10년 후에 다시 꺼내 보아도 그 힘은 변하지 않을 테니 이 시집은 훗날을 위해 고이 잘 간직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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