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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pr 28. 2019

고슴도치의 우아함

책 <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아르테, 2007년

  요즘 내가 쓰는 사심을 담은 글에서 가장 빈번하게 볼 수 있는 단어는 '아름다움'이다. 의식적으로 쓰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은 말 그대로 '아름다움' 그 자체이고, 인생을 걸 만한 가치라 생각하지만 억지로 추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은 아름답지 못한 존재가 꿈꾸는 열망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철학자가 쓴 소설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10여 년 전에 읽고 두 번째 읽는 것인데, 그때보다 지금 더 가슴에 사무치게 와 닿는다. 명확히 이해할 수 없지만 왠지 알 것 같은 마음, 공감보다는 좀 더 사적이고 내밀한 이 느낌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보통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지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두 명의 스페셜리스트, 그들은 르네와 팔로마다. 부자들이 사는 파리의 중심 생 제르멩 데 프레, 고급 아파트를 관리하는 수위인 54세 르네와 그 아파트 입주민 12세 팔로마는 서로를 모르지만 마치 영혼의 쌍둥이처럼 묘하게 닮았다. 르네는 자신의 비밀을 눈치챈 소녀 팔로마를 한눈에 알아보고 교감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아파트 로열 층으로 이사 온 일본인 사업가 오지가 합세하면서 세 사람은 짧지만 특별한 우정을 나눈다.


  가난하고 못생기고 소심한 르네는 남편이 죽자 27년 동안 혼자 아파트 수위를 하며 살고 있다. 무지하고 평범할 거란 선입견과 달리 그녀는 매우 지적이고 우아한 취향을 지닌 여인이다. 고전 문학작품을 탐독하고 미술과 음악에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다. 그녀의 지적 취향과 선택은 고등 교육을 받은 상류층의 허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곡을 찌르는 논리와 통찰로 무장되어 있다. 예술적 취향 또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고상한 미의식을 반영한다. 그녀는 입주민의 편의를 위해 허드렛일을 하며 기죽어 살아야 하는 아파트 수위에 대한 선입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태도로 위장해 사회적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며 살아간다. 허영에 찌든 상류층 입주민이라면 그 누구도 (자신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적이고 우아한 수위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팔로마는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부, 그에 따른 가족 구성원의 지적 허세와 멍청함, 특권의식과 구태의연함을 못 견뎌한다. 오죽하면 이런 세상은 살 가치가 없다고 단정 짓고 어른이 되기 전에 죽을 결심을 한다. 똑똑한 아이가 세상의 부조리를 너무 빨리 명확하게 알아챈 것이다. 자신 앞에 펼쳐질 구만리 같은 인생이 결코 아름답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감지한 순간, 그녀는 절망을 넘어 생을 저주한다.


  이 두 스페셜리스트는 가까이 살면서도 서로를 관통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신분제가 없어진 현대 사회에서는 공공연하게 계급을 나누는 잣대가 있다. 같은 아파트 건물이라도 사는 층수와 하는 일, 외모와 직업, 부와 학력에 따라 (보이지 않는 척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을 나누고, 그에 따른 말과 행동과 태도를 요구한다.


  많이 배우지 못한 르네의 명석함은, 그녀가 입주민들 앞에서 철저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적 소양을 위장하고 은폐하는 데서 단박에 드러난다. 그녀가 입주민들의 취향을 저격한 모나지 않은 수위 역할에 충실할수록, 르네의 빛나는 내면과 속물스러운 입주민들의 허세는 확연하게 비교된다.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처세하는 여자의 신중한 식견은 감출수록 빛이 나지만, 드러나면 위태로운 안타까운 축복이다. 그토록 위장하고 숨겼지만, 르네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본 노신사 오지에게 정체를 드러내며 희열과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은둔하며 사는 스페셜리스트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일 것이다.   


  부잣집 막내딸 팔로마 역시 부모의 가식과 허영, 프랑스 상류층의 방종한 특권의식과 정치 성향에 진저리 친다. 명석하고 날카로운 천재 소녀에게 세상은 부조리하고 역겨운 곳이고, 가족과 이웃은 이해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절망적인 이방인일 뿐이다. 그녀에게 르네와 오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린 스페셜리스트에게 생의 비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또 다른 스페셜리스트밖에 없다.



  운명의 특혜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다. 유복한 삶의 혜택을 입은 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에서 엄격함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것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재산인 언어와 그 언어의 사용, 그리고 사회 공동체의 형성은 신성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시간과 함께 진보하고 변화하고 잊히고 부활하고, 가끔 이 법칙의 위반이 더 큰 비옥함의 원천이 될지언정, 처음부터 성스러운 위업들에 장난과 변화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일단 그것들에 완전한 복종을 신고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회의 선택을 받은 자들, 즉 가난한 사람들의 몫인 노예상태로부터 운명이 제외시켜 준 그들은, 언어의 훌륭함을 숭배하고 준수해야 하는 이중의 임무를 갖는다.

  부자들에게는 아름다움의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


  르네와 팔로마, 오지의 남다른 취향과 지적 소신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추구하는지 명확하게 보인다. '아름다움'이다. 자신들이 이해받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죽지 않고 사는 이유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철학, 예술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 아름다움이라는 절대 가치를 은밀히 공유하고 있다. 추하고 난잡한 세상에서 인간을 인간답고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스페셜리스트가 되었다. 안타까운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 것은 세상의 비밀을 아는 사람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고슴도치로 태어났지만 우아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고슴도치 자체가 우아할 수 있다는 역설적 진실을 알려줘서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허세를 부리느니 차라리 무지한 게 낫고, 모든 지적 우아함은 드러내지 않아도 생을 신비롭게 만들어 주는 마법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다. 르네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우아한 아름다움은 충만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처럼 살고 싶다기보다는, 그런 친구를 단박에 알아보는 맑은 영혼을 지니고 싶다. 아름답진 못해도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은 잃고 싶지 않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의 의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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