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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May 17. 2019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영화를..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2018년, 테리 길리엄 감독.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이란 고유 명사는 영화에 박식하지 않아도 1년에 스무 편 이상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리 낯설진 않을 것이다. 1940년 생이시니 연륜만큼 많은 작품을 만든 감독이기도 하지만, 범상치 않은 필모그래피가 뿜어내는 아우라는 웬만한 감독은 근처도 오지 못한다. 취향 저격하는 영화 위주로 편식하는 나로서는 사실 그의 작품을 많이 보진 않았다. 「12 몽키즈」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피셔 킹」 정도만 봤다. 그 유명한 「브라질」도 아직 못 봤다. 아니, 안 봤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궁금해도 선뜻 다가가게 되지 않는 영화 앞엔 심심찮게 '테리 길리엄'이란 이름이 붙는다. 막상 그의 영화를 영접하면 독특하고 강렬한 비주얼과 쇼킹한 상상력에 매료되지만, 늘 그때뿐이고 선뜻 다가가기 쉽지 않다. 단순 명쾌하거나 논리적 기승전결의 서사가 아닌,  암울하면서도 현란한 테리 길리엄 표 상상극장은 일단 재미를 떠나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감독 토비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The Man Who Killed Don Quixote」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고전 '돈키호테'에서 원형을 차용해 구성한 서사다.

  매너리즘에 빠진 CF 감독 토비(아담 드라이버 Adam Driver)는 스페인 작은 마을에서 광고 촬영을 하는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10년 전 자신이 찍은 졸업 작품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영화 DVD를 보게 되고, 돈키호테로 출연했던 구두 수선공 하비에르 산체스(조나단 프라이스 Jonathan Pryce)를 찾아간다. 자신을 '돈키호테'라 여기는 하비에르는 토비를 '산초'로 착각, 말 '로시난테'를 타고 아름다운 아가씨 '둘시네아'를 구하겠다고 나선다. 살짝 맛이 간 노인네 하비에르는 영락없는 미치광이 돈키호테 그 자체다. 보스 여자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들킬뻔한 토비는 그 일을 무마하려다 엉뚱한 일에 휘말리며 미친 돈키호테와 파란만장한 여정을 함께 한다.



모험을 떠나기 좋은 날이구나!


  토비가 10년 전 영화를 찍었던 스페인 작은 마을은 여전히 그대로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괴하게 변했다. 순진했던 마을 사람들은 돈을 밝히고, 기르는 개를 전기충격기로 다스리는 등 뭔가 그로테스크하다. 하비에르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 같고, 토비의 졸업 작품에 둘시네아로 등장했던 순진한 시골 아가씨 안젤리카(조아나 리베이로 Joana Ribeiro)는 러시아 재벌의 여자가 되어 있다. 넌 뭐든 될 수 있다며 영화배우가 되길 부추겼던 토비 때문에 운명이 바뀐 것이다.


토비(산초)와 하비에르(돈키호테)


  10년 동안 마을 사람들만 변한 게 아니다. 누구보다 가장 많이 변한 건 토비다. 졸업 작품에 배우가 아닌 현지 사람들을 출현시켜 '돈키호테'를 만들었던 패기와 열정은 극도의 매너리즘으로 변질되었다. 보스에게 아부하기도 싫고, 광고주 비위 맞추는 것에도 염증을 느낀 그가 10년 전의 순수한 열망을 되찾고자 찾아간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둘시네아를 연기했던 안젤리카


나의 심장을 둘시네아에게 바치리!


  17세기에서 튀어나온 듯한 노인 하비에르는 토비와 함께 하는 시공간마저 그 시대로 돌려놓는다. 둘시네아를 구하러 가는 원정길에서 옛 스페인 금화를 발견하는가 하면, 동굴 속으로 굴러 떨어지니 신기루처럼 둘시네아가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고성에서 열리는 화려한 중세시대 연회에 참석한 토비는 어안이 벙벙하다. 정말 이곳이 17세기 라만차인가? 그럴 리가. 둘시네아는 안젤리카이고, 스페인 금화는 모두 가짜다. 중세의 연회는 러시아인 광고주에게 보드카 광고를 따내기 위해 광고 대행사에서 벌인 코스튬 파티다.


코스튬 파티가 열리는 중세의 성으로 가려는 토비


  17세기 정황은 21세기의 코스튬으로 재빠르게 환기된다. 용맹한 기사 돈키호테는 웃음거리 노인으로, 충성스러운 종복 산초는 비겁한 CF 감독으로, 순진하고 아름다운 둘시네아는 러시아 재벌에게 학대받는 여자로 전환된 현재는 잔인하기 그지없다. 과거와 현재가 뒤엉키고, 환상과 현실이 섞인 리얼리티 쇼 같은 상황이 정의의 이름으로, 때론 기사도의 정신으로 정신없이 펼쳐진다.


사랑은 잔인한 감옥이다, 산초!


  어느새 산초가 된 토비는, 코스튬 파티라는 인식조차 못하며 17세기 기사처럼 행동하는 하비에르를 보다 못해 그와 안젤리카를 데리고 탈출하려 하지만, 주인의 환대에 대한 의리로 거부하는 돈키호테 때문에 실패한다. 그리고 결국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난다.


'마지막 돈키호테' 하비에르 산체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하비에르 산체스는 죽기 직전, 자신으로 돌아온다. 잊혀진 노인, 구두장이 산체스로. 그리고 토비에게 말한다. "난 자네가 산초 이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모험을 떠나기 좋은 날, 어쩌면 내가 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돈키호테는 그렇게 사라진다.


중세 시대 코스튬 파티를 하는 사람들


  이 영화엔 두 명의 돈키호테와 그 돈키호테를 죽인 남자 한 명이 나온다. 하비에르 산체스가 죽기 직전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돈키호테라면, 극 밖에서 이 모든 걸 미치광이처럼 만들어낸 테리 길리엄 감독은 영원히 자신으로 돌아오길 거부하는 돈키호테가 아닐까 싶다. 그는 이 영화를 무려 30년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저작권 소송부터 배우의 부상, 촬영장 사고까지. 영화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역경을 거치며, 1989년에 시작한 돈키호테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이제야 온전히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풍차를 향해 검을 겨누며 달려드는 무모함과 광기가 아니고선, 한 영화에 대한 집념을 이리 집요하게 간직하고 관철시키는 감독이 세상에 또 있을까.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영화 한 편을 이렇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


  매너리즘에 빠졌지만, 집념과 광기를 되찾은 감독 토비를 테리 길리엄 감독의 페르소나라 말하고 싶진 않다. 그러기엔 토비는 너무 순진하고 낭만적이다. 순전히 나의 상상이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캐릭터에 순진함과 낭만적 광기를 버무려 기이한 여정을 만들어내는 노련하고 집요한 장인이다. 영화 속에선 돈키호테를 죽였지만, 세상에 또 한 명의 돈키호테를 태어나게 한 창조자다. 그와 닮은 사람은 산초나 돈키호테가 아닌 그들을 최초로 잉태한 세르반테스가 아닐까 싶다.


불가능한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가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을 따자. 그 어떤 용사도 감히 도전하지 못한 곳으로 달려 나간다. 고질적인 잘못을 바로 잡는 것, 멀리서 순수하고 순결한 사랑을 하는 것, 너무 지쳐있을 지라도 또 한 번 시도해보는 것, 다다를 수 없는 별에 다가서는 것, 이런 것들이 내가 해야 할 일들이다.                                                           

                                                                                                                  - 돈키호테- 중



  테리 길리엄 감독이 왜 이 영화를 30년에 걸쳐 만들었는지, 「돈키호테」가 왜 400년이 넘도록 사랑받는 고전이 됐는지 알겠다. 돈키호테는 미쳤지만, 테리 길리엄과 세르반테스는 결코 미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이야말로 범인인 우리가 모르는 다른 방식으로 미친 진정한 광인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을까. 이 영화는 취향을 운운하기엔 너무나 집요한 한 장인의 집념의 산물이다. 30년에 걸쳐 만든 참신한 광기의 총체를 두 시간도 못 참는다면, 그거야 말로 제대로 미친 게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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