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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May 28. 2019

파리의 ‘인싸’를 따라가는 황홀한 여정

영화 <Dilili in Paris> 2018년, 미셸 오슬로 감독

  대한민국 인구의 평균 수명까지 산다 해도 반 이상 산 내게, 과거는 아름답지만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물론 나에게도 소위 '리즈 시절'이라는 때가 있었다. 날렵하고 생기 넘치던 그때가 아쉽긴 하지만, 왠지 돌아가고 싶진 않다. 다시 돌아가면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시간은 지나간 대로 아쉬워하는 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파리의 물랑루즈


  가장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Belle Epoque)는 그동안 심심찮게 영화와 책으로 재연되었다.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인류는 앞으로 다가올 엄청난 재앙과 격한 이데올로기 대립 전에 잠시 숨 고르기를 하듯,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며 평화와 아름다움을 구가한 듯싶다. 특히 파리는 예술과 과학이 융성해 번영과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였다.


화가들을 찾아간 딜릴리와 오렐


  이 평화로운 시공간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어린 소녀들이 잇달아 유괴되는데, 마스터맨이라는 범죄조직이 용의 선상에 오르지만 사건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카나키(뉴칼레도니아 New Caledonia)에서 온 혼혈 소녀 딜릴리와 배달부 소년 오렐은 파리 곳곳을 누비며 '어린이 유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 와중에 벨 에포크의 풍요로운 예술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당대 최고의 명사와 아티스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얻는다.

 

  오렐과 딜릴리를 따라가다 보면, 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여정은 어느새 눈과 귀가 황홀해지는 환상 여행으로 탈바꿈한다. 피카소와 프리다 칼로는 살롱과 화실에서, 드가는 무희를 그리며 그들의 화려한 한때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툴루즈 로트렉이 물랑루즈 무희들을 스케치하는가 했더니, 교외의 호숫가에서는 모네가 '수련'을, 르누아르는 '시골 무도회'를 그리고 있다. 로댕의 '지옥의 문'을 보고 있으면 카미유 클로델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느' 연주를 들을 수도 있다. 광견병 걸린 개에 물린 오렐은 파스퇴르 박사를 찾아가 주사를 맞고, 어린 소녀들을 구출하기 위해 딜릴리는 과학자 마리 퀴리와 배우 사라 베르나르, 소프라노 엠마 칼베에게 도움을 청한다.


소프라노 엠마 칼베와 동행하는 딜릴리와 오렐


오페라 가르니에


  뤼미에르 형제와 말러가 입에 오르내리는가 하면 한창 뜨고 있는 작곡가 드뷔시와 마주치기도 한다. 콜레트 얘기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쥘 베른의 소설에 나올법한 기구를 타고 '오페라의 유령' 속 지하 수로 같은 파리의 하수도를 흘러가고 있다. 콩코드 광장, 오르세 미술관, 센 강, 에펠 탑, 오페라 극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소설을 쓸 거라는) 마르셀 푸르스트를 만나고 (엄마에게 용돈을 타 쓰는) 에드워드 영국 왕세자를 영접하는 행운도 누린다. 이쯤 되면 이들이야 말로 그 당시 파리의 진정한 ‘인싸’가 아닌가 싶다. 이 밖에도 나의 무지로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놓친 명사와 명소는 무수히 많고 다양하다.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셸 오슬로 감독은 아름다운 도시 파리의 리즈 시절을 작정한 듯 제대로 구현해 냈다. 4년 동안 파리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고 고증했으니 이렇게 아름답고 완벽한 벨 에포크가 눈앞에 펼쳐질 수밖에. 실사 배경 사진 위에 그림을 그려 입체적으로 구현한 19세기 말 파리는 그 자체로 예술품이자 박물관처럼 보인다. 완벽한 색감과 비주얼은 동시대 인물들이 짜임새 있게 사건에 개입하는 구성과 맞물려 또 하나의 정교한 예술품을 보는 듯한 감상에 젖게 한다. 이처럼 딜릴리와 오렐의 여정은 애니메이션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미적 쾌감을 선사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배달 소년 오렐 & 카나키에서 온 소녀 딜릴리


  어린 소녀들만 유괴하는 사건의 배경에는 혐오스러운 남성 우월주의가 깔려있다. 100년도 더 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 해도, 살롱에서 여자가 악마처럼 군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즉 세계를 구하기 위해 여자 아이를 납치해 네 발로 기게 훈련시킨다는 비이성적 발상은 화면의 아름다운 비주얼과 대조되어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프랑스어로 '방'을 뜻하는 살롱은 예술가와 지성인들의 사교 장소다. 살롱 문화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파리를 벨 에포크의 중심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통이다. 살롱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직업과 신분에 상관없이 대화하고 토론했다. 손님들의 취향과 생각을 존중하는 수평적 문화를 지향하며 살롱을 운영하는 건 안주인의 몫이었다. 사교계를 이끌며 문화와 예술을 주도하는 여자들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남성 정신병자들의 범죄는 (사건이 해결되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어도) 섬뜩하고 추악하다.


궁전을 연상케 하는 유려하고 감각적인 실내 장식


  이 범죄의 전말 못지않게 나를 철렁하게 한 건 오프닝 시퀀스다. 한 가족으로 보이는 딜릴리와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듯한) 흑인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진짜 가족이 아니라 파리 시민들의 구경거리를 위해 카나키 원주민들의 실생활을 재현한 일종의 퍼포먼스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시대엔 백인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생포해 박람회에 전시해 구경거리로 삼은 해프닝도 있었지만, 막상 보니 참담하다. 당시 사회상을 가감 없이 재현한 에피소드이고  '파리 사람도 아니고 카나키 사람도 아닌' 딜릴리라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설정이었다 해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 당시 파리는 아름답고 합리적인 도시였을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라 해도) 카나키 원주민을 구경하는 파리 시민들은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유괴된 아이들을 구해내고 환희에 차서 노래하는 소프라노 엠마 칼베


  지금의 상식과 감수성의 잣대로 보아서는 안되지만, 벨 에포크는 아름답고 좋기만 했던 시절이 아니라 추악한 이면도 포함한 생생하고 안타까운 과거가 아닌가 싶다. 역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아쉬워하는 게 좋다. 아무리 좋았다 해도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는 벨 에포크를 즐길 인류가 있다면 또 모를까.


  어쨌든 이 영화를 보면 파리에 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구친다. 딜릴리와 오렐과 함께 한 여정을 그대로 되밟을 순 없겠지만, 에펠 탑과 콩코드 광장, 몽마르트와 오페라 극장 가르니에를 실제로 본다면 아름답고 유려한 이 영화의 비주얼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을 게 분명하다. “가끔 인생은 정말 멋진 걸 주기도 해요”라는 딜릴리의 말이 실감 나는 순간, 우리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는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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