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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17. 2019

무거운 그 이름, 가족

영화 <라스트 미션 The Mule> 2018년

  90년 가까이 산 노인이 말한다. 다른 건 다 살 수 있는데 시간은 못 산다고. 너무 당연한 말이 너무 타당한 인물 입에서 나오니 더는 할 말이 없다. 90에 가까운 배우가 연기한 90에 가까운 노인의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그럴듯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진다. 1930년 생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연기한 87세 마약 운반책 얼 스톤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고 단순하다. 가족은 있을 때 잘해야 한다!




얼과 아내 메리


  얼 스톤(클린트 이스트우드 Clint Eastwood)은 백합농장을 하며 원예 컨벤션에 나가는, 얼핏 보면 평화롭게(?) 나이 든 노인이다. 오랜 지인들과 썰렁하지만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 턱 쏘고, 정성껏 가꾼 꽃을 이웃 할머니들에게 주며 로맨틱한 찬사도 할 줄 아는 멋쟁이 할아버지다. 그러느라 정작 딸의 결혼식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는 대외적으론 호인(好人)이지만 가족에겐 인색하고 무신경한 노인이다. (왠지 이런 노인 낯설지 않다. 우리 주위엔 이런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백합 컨벤션


  12년이 흘러, 더 늙고 노쇄해진 얼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백합 농장은 압류당하고 가족들에겐 외면받는다. 아내 메리(다이앤 위스트 Dianne Wiest)는 남편을 포기한 지 오래고, 딸 아이리스(앨리슨 이스트우드 Alison Eastwood)는 12년째 아버지와 말도 안 한다. 그나마 손녀 지니만이 할아버지를 반기지만, 돈도 잃고 인정마저 잃은 얼은 무기력하고 초라한 노인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멕시코 마약 카르텔 조직원이 접근해 은밀한 제안을 한다. 돈을 줄 테니 물건(마약)을 운반해 달라는 것. 평생 미국 전역을 누비며 교통 위반 딱지 한 번 안 뗀 노인에게 이보다 더 솔깃한 제안은 없다. 조직원 입장에서도, 87세 노인이 트럭에 마약을 가득 싣고 달린다는 상상을 그 누구도 하지 못하리란 선입견에 기댄 절묘한 술책이 아닐 수 없다.


손녀 지니와 얼 & 딸 부부


  얼은 생각보다 능숙하게 일을 해낸다. 고령의 노인은 의외로 임기응변에 강하다. 경찰이나 마약 수색견과 맞닥뜨려도 능청스럽게 넘긴다. 가사가 민망한 노래를 크게 따라 부르며 운전하고, 도로 중간에 내려 사람들을 돕기도 한다. 노인 특유의 고집스러운 편견을 보이고 부적절한 말도 내뱉지만, 고령이라서 용서되고 넘어가기도 한다. 도로에서 타이어가 펑크 난 젊은 흑인 부부를 도와주며 그가 '니그로 negro'라는 단어를 말하자, 젊은 부부는 난감해하며 요즘은 그런 용어 안 쓴다고 친절히 알려준다. 얼은 또 그 충고를 무심한 듯 유연하게 받아들인다. 이 에피소드는 '얼'이란 인물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하고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얼은 그런 사람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선량하지만, 87년을 외골수로 산 사람답게 고지식하고 무지한 올드맨이다. 인종이나 게이에 대한 차별은 안 하지만 무신경하고 무책임하다. 가족을 아끼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마음은 따뜻하지만 배려가 부족하고, 인간적이지만 때론 어리석다.  


87세에 마약 밀매 조직 운반책이 된 '얼 스톤'


  운반책의 정보를 입수한 마약 단속국 특수요원 베이츠(브래들리 쿠퍼 Bradley Cooper)는 눈에 불을 켜고 그를 추적하는데, 얼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마약 운반책(the mule)의 닉네임이 '타타(할배)'라는 것까지 알아내고도 베이츠는 눈앞에 있는 '할배' 얼을 놓친다. 베테랑 베이츠도 설마 휴대폰 문자조차 제대로 못 보내는 어리숙하고 순박한 노인이 마약 운반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87세 노인은 절대 마약 운반책이 아닐 거라는 단순하고 고질적인 선입견은 마약 카르텔에겐 행운이었고, 노인에겐 꽤 큰돈을 안겨준다.


경찰 단속마저 능청스럽게 피하는 얼


  나쁜 짓인 줄 알지만 얼은 이 일을 멈추지 못한다. 평생 가장 노릇을 못했기에 뒤늦게 가족들에게 돈이라도 보태주려고 위험한 운반을 감행한다. 그의 뜻은 가상하지만 수십 년 간 상처 받은 가족들 마음이 돈 몇 푼에 회복될 리 없다. 그에 반해 얼을 쫓는 마약 단속국 요원 베이츠는 꽤 가정적인 남자로 비친다. 그가 유난히 가정적이라기보다 얼과 비교되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보인다. 베이츠는 임무 때문에 떨어져 지내는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고, 결혼기념일을 깜빡한 걸 민망해하는 평범한 남자다. 늙고 후회 투성이 삶을 산 얼은 은연중에 만난 젊고 유능한 요원 베이츠에게 뼈 때리는 충고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시간은 절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아마 아직 기회가 많은 젊은 남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고 싶은 참회의 말이었을 것이다.   


  죽어가는 아내 곁을 지키느라 얼의 마지막 임무엔 차질이 생긴다. 마약 조직의 협박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에도 그는 평생 못한 마지막 임무, '아내를 져버리지 않는 것'을 드디어 해낸다. 그리고 87세에 간신히 가족에게 돌아왔지만, 죗값을 치르느라 감옥에 간다. 딸은 말한다. 그나마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서 다행이라고.


12년 만에 간신히 화해한 딸과 얼


  평생 가족 곁만 빼고 전국을 떠돌아다닌 남자의 변명은 구차하고 안타깝다. 집에서 인정받지 못해 밖에서라도 인정받고 싶었다고, 그래서 가족을 등한히 할 수밖에 없었다는 속내는 어리석고 한탄스럽다. 그가 선량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진심으로 뉘우쳐도 솔직히 좋게 보이지 않는다. 너무 늦었다. 말년에 몇 달 반짝 위험을 무릅쓰고 번 돈을 갖다 줬다고 평생 지은 죄가 용서되나. 그나마 아내 임종을 지킨 게 어디냐는 말은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된다. 남편이 아내의 임종을 지키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대단한 희생과 수고가 아니다. 물론 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부분도 있고, 그의 가족들도 다 잘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의 위험한 개과천선은 내 가족이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어리석은 범죄의 다른 면일뿐이다.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가족이라서 용서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가족이라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가장의 책임감에 지레 짓눌려 제대로 가장 노릇도 안 하고 겉도는 사람에겐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이름일 것이다. 가족에게 그런 가장은 깃털보다 가벼운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래서 가족은 한없이 무겁지만, 누군가에겐 외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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