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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20. 2019

판사님, 이게 최선입니까?

영화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2017년

  "이게 최선입니까?" 수년 전, 드라마에서 자주 듣던 이 대사는 살면서 은연중 타인에게 혹은 자신에게 자주 내뱉게 되는 말 중 하나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처럼 흔하게 쓰지만 무참하게 짓밟히는 말이 또 있을까.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도, 결과에 따라 과정의 진정성은 없어지고, 심지어 왜곡되는 게 세상의 일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벽을 기대하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눈물겹지만, 그래서 부질없고 서글프기도 하다.



  가정법원 판사 피오나 메이(엠마 톰슨 Emma Thompson)는 한눈에 봐도 꼼꼼하고 합리적인 재판관이다. 그녀가 맡은 사건은 주로 아동의 복지와 생존에 관한 케이스다. 피고 측이 된 부모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 매우 난감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샴쌍둥이 중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한 분리수술을 심리하는 일은 나머지 한 아이를 희생시켜야 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대로 두면 두 아이 목숨이 모두 위태롭다는 걸 알면서도, 부모는 한 아이를 위해 다른 아이 숨을 끊는 수술에 반대한다. 메이 판사는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에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결을 내린다. 그녀의 기준은 오직 하나다. 도덕과 생명윤리보다 앞선 아이의 생존, 즉 아이의 복지다. 엄연히 살릴 수 있는 한 아이의 생명만 생각한 판결은, 불완전하지만 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선의 결정이다.


가정법원 판사 '피오나 메이'


  피오나는 유능한 판사지만 결혼 생활은 파탄 직전이다. 일에 파묻혀 아이도 안 갖고 20여 년 간 유지해 온 부부관계는 위기에 직면했다. 아내의 냉담함에 질린 남편 잭(스탠리 투치 Stanley Tucci)은 대놓고 선언한다. "아무래도 나 바람피울 것 같아."


피오나와 남편 잭


  결국 잭은 집을 나가고, 피오나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사건을 맡는다. 종교(여호와의 증인) 때문에 수혈을 거부하는 백혈병으로 투병중인 소년 애덤(핀 화이트헤드 Fionn Whitehead)과 그 부모를 상대로, 수혈 명령을 내려달라고 병원 측이 요청한 케이스다.


  법정에서 만난 병원 측 변호사와 소년의 부모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영혼은,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여호와가 그를 일으킬 겁니다." 수혈을 거부하면 아이가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소년의 부모는 신앙에 어긋나는 수혈을 거부한다. 생존 확률을 높이는 수혈을 거부하면 애덤이 종교의 무의미한 순교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먹히지 않는다.  


백혈병에 걸린 애덤의 병실을 찾아온 피오나


  아들이 백혈병에 걸린 순간 믿음의 시험대에 오른 부모의 주장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그 어떤 종교와 신념도 생명보다 존귀할 수 없다는 게 상식이지만, 피는 신이 주신 근원이고 생명이기에 다른 피가 섞이는 것은 오염이고 타락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수혈 거부로 아들이 죽더라도, 앞으로 도래할 지상낙원에 자리 잡을 것이라는 덴 할 말이 없어진다.


  병원 측 변호사는 성경이 쓰인 시절엔 수혈 자체가 없었는데 어떻게 성경을 들먹이며 수혈을 거부할 수 있냐고, 아이가 수혈에 동의하면 어쩔 거냐고 반박한다. 몇 개월이 모자라 만 18세가 되지 않은 소년의 의사 결정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일임된 상태다. 더 높은 권능을 따르는 기쁨을 모른다며 여호와 증인 신도들의 격한 반박을 들은 피오나는 이례적으로 당사자인 소년을 직접 만나 의사를 물어보겠다고 한다.


  후견인과 함께 병원에 온 피오나는 죽어가는 애덤을 보며 참담한 심정이 된다. 아이는, 자신은 부모와 독립된 존재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죽을 각오가 돼 있다면서, 확고한 종교적 의사에 따른 환자의 거부권을 행사한다. "내 의지대로 살기로, 아니 죽기로 했어요."


최선을 다해 합리적인 판결을 하려는 판사 피오나 메이


  이렇게 소신을 밝힌 소년에게 판사는 어떤 최선을 행해야 할까. 대체 어떻게 설득하고 판단해야 소년의 믿음을 돌리고 생명을 구할 수 있을까. 사실 (상식적이고 합당한) 답은 정해져 있다. 이유 불문하고 강제적으로 명령을 해서라도 무조건 아이를 살리는 것이다. 꼭 존경받는 판사가 아니더라도, 아이가 (의미 없어 보이는) 순교자가 되는 걸 방치하길 바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피오나는 수혈을 받지 않으면 회복한다 해도 다른 장기에 이상이 생겨 장애가 올 수 있다며 아이를 설득한다. "장애를 겪는 불완전한 회복, 그게 과연 신이 진정 원하는 것일까?" 그 말에 주춤하던 애덤은 천진한 소년답게 새로 배운 기타를 친다. 그가 치는 기타 반주에 예이츠(William Yeats) 시를 가사로 붙인 '샐리 가든(Down by the Sally Garden)'을 피오나가 노래하자, 애덤은 묘하게 생기를 되찾는다.


  피오나는 아직 삶에 진지하게 대면할 기회조차 없었던 애덤을 위해, 늘 그렇듯이 최선을 다해 판결을 내린다.

  
"법정은 아동의 복지를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한다. A 자신과 부모, 교단 장로들이 그의 복지에 반대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봅니다. A의 존엄성보다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 수혈을 명령합니다."


  1989년 제정된 영국의 아동법(The Children Act)은, 법정이 미성년자와 관련한 사건을 판결할 때 최우선적으로 '아동의 복지'를 고려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이 아동법에 근거하여,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판사는 최선을 다해 소년의 생명을 구했고, 그의 앞날은 밝게 빛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불완전하고, 세상은 보란 듯이 불완전한 인간이 결정한 최상의 선의를 짓밟는다.


피오나에게 집착하는 애덤


  애써 살려놓은 소년은 스토커처럼 피오나를 쫓아다니며 자신이 적은 시와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를 준다. 자신의 인생에 개입해 생명을 구했으니, 남은 생에 대한 답도 알려달라는 듯한 태도다. 살아난 게 기쁜 미숙한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은 모호하고 의문투성이다. 종교적 신념은 흐지부지되고 부모에게 배신감까지 갖게 된 애덤은 피오나에게 향하는 기이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생의 의문을 판사가 답해주길 원하는 소년


"판결문을 봤어요. 제 종교와 저 자신으로부터 저를 구하고 싶다고 하셨죠? 저를 구하셨어요. 전 딴 사람이 됐어요.

"(너의) 신은 어디 있니?"

"어디든 있죠."

"신앙을 잃은 거니?"

"아니요."


  이 시점에서 피오나는 성숙한 어른으로 상식적으로 정중하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려보낸다. 그녀의 일상은 바쁘게 흘러가고, 메마른 결혼 생활은 삐그덕 대지만 그럭저럭 유지되는 듯 보인다. 아담의 병이 재발하기 전까지.


  호스피스 병동에서 치료를 거부하는 애덤을 찾아온 피오나는 호소한다.

"기억해, 다가올 삶과 사랑을. 시와 여행을..."  

"제 선택이에요, 판사님."


병이 재발한 애덤 때문에 심경이 복잡한 피오나


  피오나는 죽어가는 애덤을 생각하며 남편에게 울먹인다. "애덤은 우리랑 같이 살고 싶어 했어. 같이 배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우리가 자기 인생을 바꿔줄 거라고, 뭐든 답해줄 거라 믿은 몽상가였지. 수혈을 거부해 폐에 물이 차 죽어 가. 이제 성인이라 강제로 어쩔 수 없어." 
      

애덤은 어떤 삶을 원했을까


  최선을 다한 피오나에게도 (너무나 당연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결혼 생활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어렵게 살려놓은 소년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볼 수밖에 없다. 피오나는 최상의 선의를 위해 복무하지만, 결과는 늘 아슬아슬하고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그녀가 불특정 다수의 아이들을 위해 내리는 결정은 직접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어도 합리적이고 최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판단은 누군가의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하고 심지어 목숨도 앗아간다. 그녀의 생을 덮친 이 딜레마는 대체 누구에게 판결을 맡겨야 하는 것일까.


"그냥 판결만 하지 왜 제 인생에 끼어들어요?" 언젠가 애덤이 피오나에게 한 말이다. 피오나는 애덤을 살리려는 의지만 가졌을 뿐, 그의 인생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고 실제로 끼어들었다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가 죽을 때까지.

 

결국 죽음을 택한 소년


  꼭 판사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 산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누군가의 인생에 개입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람이라도 타인과 거리를 유지한 채 최선을 다할 순 없다. 물론 때에 따라 일정한 거리는 필요하고, 바람직하다. 하지만 남의 인생에 끼어들지 않고 다할 수 있는 '최선'이란 얼마 없다는 걸 우린 알고 있다. 그게 결과적으로 최악이었다 해도, 최선을 다한 선의만큼은 존중되어야 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지레 포기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세상에 흐르는 슬픔과 눈물이 최선의 오류로 생긴 불행보다 더 많아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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