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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26. 2019

이런 거짓말이라면 얼마든지 오케이!

영화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 2018년

  심플하고 깔끔하며 세련됐다. 명쾌하고 합리적이다. '이케아(Ikea)'로 상징되는 북유럽 특유의 편리하고 저렴하며 합리적인 생활양식은 유럽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도 뭄바이에 사는 어린 소년이 이케아 카탈로그를 보고 유럽을 동경하는 것은, 살짝 뜬금없긴 해도 있을 법한 일이다. 적어도 '한 남자와 그에게 주어진 기회에 대한 이야기'라는 왠지 진지하고 거창할 것 같은 서사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 The Extraordinary Journey of the Fakir」의 시작이 이케아라는 브랜드에서 비롯됐다는 것만큼 황당하진 않다.


일생의 소원이던 '이케아'매장에 온 남자


  모든 인간은 차별 없이 공평한 기회를 갖는 게 마땅하지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확연한 차별을 경험한다. 인종, 성별, 국적, 부모의 직업, 건강, 재산 정도에 따라 아이들의 인생은 각기 다른 배타적인 경계선 안으로 정해진다. 나약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불평등을 운명이나 업(카르마)으로 치부하며 감내한다. 간혹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겠다고 모험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이 행동하는 작은 영웅들에 열광한다. 운명론자가 현실에 안주해 주저하는 동안, 모험가가 위험을 무릅쓰며 겪는 좌절과 환희는 간접 경험만으로도 어느 정도 삶을 풍성하게 해 준다.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소년 '아자'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인도 소년 아자의 삶은 척박하다. 노동에 시달리는 가난한 엄마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마저 부정한다. 어린 아자는 길바닥에서 사촌들과 눈속임 마술을 하며 푼돈을 번다. 커서도 그 생활은 변함없다.
  병으로 죽은 엄마의 유품에서 아버지에 대한 단서를 찾은 아자(다누쉬 Dhanush)는 100유로짜리 위조지폐를 들고 무작정 파리로 향한다. 어릴 때부터 동경해 온 이케아 매장부터 찾은 아자는 그곳에서 운명의 첫사랑 마리(에린 모리아티 Erin Moriary)를 만난다.

  그는 다음 날 마리와 에펠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이케아 옷장 안에서 잠드는데, 눈 떠보니 소말리아인 불법 이민자 위라지 일행과 함께 영국 런던에 와있다. 이후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탈리아 로마, 리비아 트리폴리로 이어지는 아자의 버라이어티 한 여정은 고달프면서도 유쾌하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을 만큼 격정적으로 터지는 사건과 사고는 타고난 운명 못지않게 만들어가는 운명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리의 '이케아' 매장에 온 아자


  아자의 삶은 '거짓'에서 시작된다. 엄마는 아빠 없이 태어난 아들을 '기적'이라고 하지만, 막상 아자가 자신은 남자냐고 묻자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정한다. 아빠를 찾는 아이에게 남자 자체를 차단하는 걸로 홀어머니의 고단한 속내를 드러낸다. 아자가 길바닥에서 하는 짓은 눈속임과 도둑질이다. 그는 파리에서 자신을 속이며 같은 거리를 뱅뱅 도는 택시기사에게 기꺼이 속아주며 위조지폐를 건넨다. 이케아 매장에서 만난 마리도 유쾌하지만 거짓으로 점철된 상황극을 하면서 가까워진다. 악의가 없고 심각하게 보이진 않지만, 그의 처세는 거짓에 기반을 두고 있다. 태생과 환경이 그를 유쾌한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타고난 업, 이미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며 산다면 아자는 그렇고 그런 좀도둑과 사기꾼으로 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이케아 매장에서 만난 마리와 아자


  뭄바이 소년에겐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이케아 가구는, 알라딘이 타고 밤하늘을 나는 마법의 양탄자처럼 아자의 운명을 풀어헤쳐 씨줄과 날줄을 다시 엮는다. 


행운과 모험,  위험이 가득한 아자의 여정


  아자가 영국에서 불법 이민자 취급받는 시퀀스는 유럽의 난민 문제를 환기시킨다. 전쟁을 피해 조국을 떠나 유럽에 정착하려는 불법 이민자들을 영국 당국은 바르셀로나 행 비행기에 짐짝처럼 실어 보낸다. 아자는 관광객인데도 불법 이민자 취급당하며 여권까지 빼앗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부유한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나 발칸반도 난민들을 대하는 태도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거칠고 비인간적이다. 난민에 배타적인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뮤지컬처럼, 발리우드 스타일로 영국 난민 담당자의 행동을 묘사해서 그런가, 난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더 비열하고 잔인하게 느껴진다. 스페인은 공항에 떼로 불시착한 난민들 때문에 난감해한다. 두 나라가 사람들을 짐짝 취급하며 서로 안 받겠다고 아우성치는 동안, 불법 이민자들은 공항에서 불안한 삶을 이어간다.


아자와 소말리아 불법 이민자 위라지


  운명을 바꾸겠다는 아자의 강렬한 의지는 그를 로마로 데려가 커다란 행운을 맛보게 한 후, 곧이어 목숨까지 위협하는 불운으로 몰아넣는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아자는 유명 여배우를 만나 클럽에서 발리우드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만났던 신(God)을 떠올리며 쓴 글로 거액의 돈을 얻지만, 그 돈 때문에 혼비백산하다 아프리카까지 흘러들어 간다.


로마에서 만난 여배우 넬리와 아자


  리비아 트리폴리 난민촌에서 불법 이민자 위라지를 다시 만난 아자는 난민들의 도움으로 잃었던 돈을 찾은 후, 그 돈을 기꺼이 그들의 꿈을 위해 내놓는다. 아자타샤트루 라비쉬 파텔, 길고 독특한 이름만큼이나 다사다난했던 그의 여행은 뜻밖의 행운과 불행,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위험과 평생 잊지 못할 로맨스를 남긴 채 끝난다.


엇갈린 운명 때문에 아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리


  아자의 환상적이고 기이한 모험은 사실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자신의 모험담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주는 저의부터 심상치 않다. 나쁜 짓을 해 감옥에 갈 뻔한 어린 소년들을 교화시킬 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어른은 흡족하게 목적을 달성한다. 화해는 원래 극적으로 해야 제맛이고,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가. 아자가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한 남자가 진심을 담아 시연한 그럴듯한 마술이다. 그가 길거리에서 익힌 싸구려 눈속임과 원리는 같지만, 이번엔 인생과 운명을 건 공연이었다. 두 번 다시 못 만들어낼 이 마법 같은 경험담은 아이들의 삶을 바꾸었고, 무엇보다 아자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거짓말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술을 믿고 싶은 이유다. 삶이 기회의 연속이라면, 그 기회를 잡고 이용하는 건 인간의 의지다. 거리의 눈먼 노인이 신이 아니라고 그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어린 소년 아자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이케아'


  운명은 정해진 것인가 스스로 만드는 것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기회는 운명인가 의지인가. 햄릿부터 아더왕, 고대부터 현대까지, 실존과 가상의 인물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뇌하는 화두다. 정답은 없다.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 극적인 짜릿함을 갈망하지만 일상의 평화를 추구한다. 여행가방을 싼다고 현실이 드라마틱해지진 않겠지만, 가끔 일상이 부리는 마법을 기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실용적인 이케아 옷장을 마법의 상자로 만든 누군가처럼. 낯선 인도 청년의 모험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짜릿함을 느꼈다면 우리에게 통한 게 분명하다, 그의 거짓말 같은 마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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