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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09. 2019

불륜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

영화 <미성년> 2019년


  불륜이 발생했다. 당사자들인 상간남과 상간녀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가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이들이 사랑이라 착각하는, 혹은 우기는 감정은 더럽고 치졸하게 새어 나와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물론 불륜남녀가 제일 한심하고 괴롭겠지만, 이들이 온몸으로 겪는 괴로움은 마땅히 치러야 할 당연한 귀결이다. 인간적으로 아주 조금 동정의 여지가 있다 해도, 자신들이 놀아난 결과로 누가 죽었고, 누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지 상간남과 상간녀는 죽을 때까지 잊지 말았으면 한다.




상간남 대원


상간녀 미희


  영화 「미성년」은 '불륜'이란 사건에 던져진 아이들과 어른들의 태도를 전복하여 보여준다. 상간남 대원(김윤석)은 고등학생인 딸 주리(김혜준)에게 내연 관계가 발각되자 줄행랑친다. 아버지로서 위신이나 체면은 온데간데없다. 딸에 대한 미안함이나 양심의 가책은 자신이 저지른 파렴치한 짓 속에 끼어들 여지가 없는 듯하다.
  상간녀 미희(김소진)의 대책 없는 감정은 차라리 불쌍할 정도다. 그녀가 믿어 의심치 않은 '마지막 사랑'의 정체는, 임신시켜 애를 낳아도 책임은커녕 나타나지도 못하는 염치없는 남자일 뿐이다.
  상간남의 아내 영주(염정아)는 상간녀 딸 윤아(박세진) 앞에서 울기까지 하지만 나름 현실적이다. 남편의 파행 앞에서 그녀는 최소한의 회개와 의무를 이행하는 동시에 저금통장을 체크하고 집값을 계산한다.
  윤아의 친부(이희준)는 무능과 무책임과 무신경을 합쳐놓은, 누군가의 아버지가 절대 되어서는 안 되는 남자다. 아이들의 선생님은 또 어떤가.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꼰대다.  


상간남의 아내 영주


  부모가 저지른 불장난의 여파를 온몸으로 뒤집어쓰는 건 아이들이다. 상간남의 딸과 상간녀의 딸은 부모를 대리해 격정적인 몸싸움까지 하며 이 몹쓸 장난을 수습하려 한다. 불륜의 증거이지만 소중한 생명인 조산아를 어떻게든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것도 아이들이다. 정당하지 못한 절차로 태어났지만, 주리와 윤아는 아빠와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동생에 대해 원초적인 애정을 보인다. 아이들이 그러는 동안 어른들은 그저 방관만 한다. 제일 책임이 무거운 상간남은 방황하는 코스프레를 하고, 철없는 상간녀는 또 한 번 실패한 사랑에 우울해한다. 세상을 겪어보지 않은 아이들은 겁이 없어 그럴 수 있는 것일까.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무능한 엄마 대신 갓난 동생을 기르겠다고 나서는 윤아나, 아빠는 밉지만 아기는 끝내 미워하지 못하는 주리나, 별로 미덥진 않지만 진정성은 있어 보인다.


엄마의 불륜을 폭로한 윤아


아빠의 불륜을 염탐한 주리


  어느 날 불쑥 생겨버린 미숙한 생명을 둘러싼 아이들과 어른들의 태도는, 성숙한 인간과 성숙하지 못한 인간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생명의 1차적 책임자들인 불륜남녀의 체념과 방황은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을 정도로 저급하고 무기력하게 보인다. 인간이 성숙하다는 증거는 사랑을 하고 생명을 만드는 능력과 행위가 아니라, 그 이후 삶의 태도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고 태어난 생명을 길러내는 것은 본능이기 전에 삶의 양식이라 생각한다. 성숙할 자신이 없는 인간들은 감정 핑계 대고 장난치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이 한때 즐긴 저급한 쾌락이 얼마나 많은 불행을 낳는지 무수히 봤지만 무수히 반복되는 건, 인간이 성숙하기 매우 힘든 동물이라는 증거 같아 찝찝하다. 그 와중에도 순수한 성숙함을 보여주는 미성년자도 있긴 하지만.


부모를 대신해 대리전을 치르는 두 아이


  상간남의 무책임과 비열함이 부른 상처, 상간녀의 철없음과 어리석음이 낳은 초라함은 그들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에 비하면 매우 약소하다. 아이들은 성숙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고통받지만 조산아 동생을 인정하며 성숙해진다. 그나마 현실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상간남의 아내는 (별 일 없다면) 깨진 그릇 같은 남편을 버리지 않고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녀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어서가 아니라, 배우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살아가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참는 게 능사가 아니더라도 참을 가치가 없는 것을 참으면 '시간'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아마 그 '시간'은 다른 이들의 시간과는 다른 농도와 질감으로 채워질 것이다. 미성년자가 성숙해지는 데는 소양과 더불어 시간이 필요하다.


엄마와 딸


  미성년을 성년으로 만드는 건 '나이'가 아니라 '남다른 시간'이다. 윤아와 주리가 함께 한 십 대의 며칠이 그들의 부모가 살아온 몇십 년의 시간보다 가치 있고 성숙하게 보인다. 물론 그들도 이런 식으로 성숙해지길 원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싶다. 그래도 이왕 사는 거, 파렴치한 어른보다는 자신을 스스로 키울 줄 아는 성인으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아픔을 동반한다고 성숙해지길 거부한다면 나 대신 주위 사람들을 아프게 할 게 분명하다. 이것이야 말로 다 자란 어른이 해서는 안될 몹쓸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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