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롱샷 Long Shot> 2019년
나만 그런가? 명랑 발랄하고 약간 달달하기까지 한 최근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문득 29년 전으로 회귀하는 것은. 내가 나이 먹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자각하게 될 줄 몰랐다.
타이틀부터 '거의 승산 없는 도전'(long shot)이라고 엄살을 뿌려대면서 온갖 흥행 요소는 다 몰아넣은 유쾌한 코미디 「롱샷 Long Shot」은 유능하고 매력적인 미국 국무장관 샬럿 필드(샤를리즈 시어론 Charlize Theron)와 엉뚱한 연설문 작가 프레드 플라스키(세스 로건 Seth Rogen)의 파란만장한 로맨스를 쉴 틈 없이 보여준다.
정부와 기득권을 급진적으로 까대는 사고뭉치 기자 프레드는 실직 후 친구를 따라간 상류층 자선 파티에서 뜻밖의 여인과 재회한다. 어릴 적 첫사랑이자 자신의 베이비시터였던 샬럿이다. 그녀는 현재 국무장관으로 촉망받는 차기 대선 후보다. 블랙 계열의 깔맞춤 슈트와 칵테일 드레스를 갖춰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알록달록한 방풍점퍼 비슷한 옷을 입은 프레드는 단연 눈에 띈다. 파티의 초대 가수 '보이즈투맨(BOYZ Ⅱ MEN)'에 열광하는 샬럿과 프레드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십 대 시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정말 절묘한 타이밍에 십 대의 한 자락을 함께 했던 서로를 발견한다.
이 우연한 만남으로 샬럿은 프레드를 자신의 선거 캠프 연설문 작가로 기용한다. 프레드는 거친 입담과 날카로운 필력으로 샬럿의 부족한 유머감각을 채워준다. 샬럿의 빡빡하고 경직된 공직 생활에 프레드는 거칠지만 다이내믹한 활력소가 된다. 십 대 시절, 샬럿의 명민한 모습을 기억하는 프레드는 그녀에게 그 시절의 순수한 이상을 상기시킨다. 업무 차 간 해외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샬럿을 보좌하는 매기와 톰은 이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관계를 경고하는 한편 방어하기에 여념이 없다.
얼핏 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로맨스는, 남녀의 위치만 살짝 바꿔놨을 뿐 전형적인 신데렐라 탄생기다. (미국 국무장관이자 차기 대선 후보인) 성공한 연상의 여자와 (전직 기자이자 현직 백수인) 지질한 남자의 조합은 신선해 보이지만, 남녀만 바꾸면 매우 익숙한 모양새다. 이 둘의 사랑을 엮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필리핀 호텔에서 당한 테러가 아니라 '보이즈투맨'과 '록셋(ROXETTE)'이 아닐까 싶다. 아르헨티나의 클럽에서, 남들은 다 격정적인 탱고를 추는데 주방에 몰래 숨어 들어가 아이폰으로 틀어놓고 춤을 춘 그 노래 'It Must Have been Love'. (나도 한때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이 노래를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두 사람이 어린 시절인 90년대를 함께 보내지 않았다면, 영화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의 이 사랑의 테마를 공유하지 않았다면, 그 어떤 테러를 겪고 생사를 함께 넘나들었다 한들, 적나라한 가사를 흥얼거리며 서로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굳이 2019년 영화를 1990년에 탄생한 로맨틱 코미디와 비교해 평행이론을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샬럿과 프레드가 함께 한 순수했던 90년대의 이데올로기는 이들을 은근하지만 끈끈하게 이어준다. 격정적인 정치판에서 젊고 섹시한 여자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망까지 품고 사는 샬럿은 애써 수립한 정책을 쉽게 타협하려 한다. 그녀가 권력에 미움받지 않고 국민에겐 매력적으로 어필하고 싶은 건 당연한 욕망이다. 하지만 속물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악의는 없을지 모르지만, 말 몇 마디로, 연설문 문구 한 두 개로 지구 생태계를 좌우하는 엄중한 힘을 가진 그녀를 프레드는 거침없이 몰아붙인다. 한편 그녀의 순수했던 이상과 현재의 욕망을 절묘하게 배합하는 마술을 시전 하며 그녀를 드높인다. 여자의 힘을 위해 지략을 모으는 남자, 그녀를 보좌하고 힘이 되며 수고를 감수하는 남자는, 그동안 봐왔던 상대만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신데렐라와는 확실히 다르다.
「귀여운 여인」의 비비안은 거리에서 매춘을 하다 백만장자 에드워드를 만난다. 프레드가 샬럿과 재회한 파티장에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은 '노숙자'같다는 말이다. 거리의 여인과 노숙자쯤은 되어야 백마나 리무진을 탄 파트너를 만날 자격이 주어지는 건가. 거리의 여인이 차림새로 멸시를 받는다면, 지질한 전직 기자는 유튜브에 오른 망신살 뻗치는 동영상으로 조롱거리가 된다.
비비안이 때 묻지 않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에드워드를 사로잡는다면, 프레드는 온갖 엉뚱한 추태를 시전 하며 샬럿의 마음을 지배한다. 또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기보다는 상대의 순수함을 상기시키는데 집중한다. 90년대의 사랑의 완성은 서로에 대한 진실한 마음이면 충분했지만, 2019년에는 다소 복잡하다. 샬럿의 보좌관 매기는 프레드를 샬럿의 정식 파트너로 승격시키려면 전문가를 고용해 그의 과거를 깡그리 지워야 한다고 말한다. 21세기 남자 신데렐라는 진실을 감추고, 파트너의 격에 맞춰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길 요구받는다. 확실히 과거보다 가혹해지긴 했다.
샬럿은 프레드의 민망한 사생활을 찍은 몰카 영상을 확인하고, 자신의 사랑을 접는다. 그를 지키기 위한 비장한 결심이지만, 프레드의 동영상 수위가 매우 높으면서도 웃겨 별로 안 심각하게 보인다. 결국 그들이 사랑을 쟁취하는 방법도 자폭에 가까운 동영상 노출로 자신들을 전 국민 앞에 까발리는 것, 즉 진심이 충만한 사생활 폭로다. 유튜브를 통해 이런 식으로 진심이 통하는 나라라면, 웬만한 사랑의 장애는 이제 영화에서 얼씬도 못할 듯싶다.
미국의 정치는 한 마디로 거대한 리얼리티 쇼라고 한다. 대통령은 영화배우 못지않은 인기와 악플러를 지닌 셀럽이고, 선거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격정적인 드라마다. 실제로 영화배우 출신 대통령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영화 속 (드라마 배우 출신) 현직 대통령이 영화계로 가기 위해 재선을 포기하는 설정이 마냥 코미디로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를 하든 정치를 하든, 유명인이 되어 전 국민에게 어필하고 욕먹어가며 인기를 쟁취하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샬럿과 프레드가 벌이는 요란한 사랑놀음은 정치도 쇼로 대하는 미국인의 취향을 저격한 설정답다. 국제 사회의 이권을 둘러싼 갈등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처세, 미디어의 위력과 그에 대처하는 정치인들의 쇼맨십, 정치 성향과 종교에 따른 극명한 편 가르기 등. 남녀를 살짝 바꾼, 늘 기본 이상 어필하는 이 (남성판) 신데렐라 이야기는 2019년 미국 사회의 갈등과 이슈를 가볍게라도 담고 있어서 볼 만한다.
「롱샷 Long Shot」이 늘 수요와 공급이 충만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 속에서, 결코 '모험을 건 시도'가 될 수 없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만큼 확실히 웃기고 완벽하게 재밌다. 리무진 탄 백만장자 남자와 헐벗은 거리의 여자가 등장하는 고전적 신데렐라 탄생기의 전복을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라도 충분히 즐길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