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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18. 2019

무너지는 가족을 이어주는 '비밀'이라는 접착제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 Everybody Knows> 2018년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없습니다.


  '비밀'의 역설은 끝까지 비밀로 남기 가장 어려운 것이 비밀이라는 데 있다. '이건 비밀이야.'라는 말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을 은연중에 각성시킨다. 이 비밀은 언젠가 반드시 폭로되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못할 것임을 예고한다.


  혈연과 인연으로 맺어져 운명을 같이 하는 가족은 가깝고 끈끈한 만큼 크고 작은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그만큼 많은 비밀이 양산되고 깨지는 공동체이다.


고향에 온 라우라와 딸 & 옛 친구 파코와 그의 조카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즈 Penelope Cruz)는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들과 딸을 데리고 스페인 고향집에 온다. 아름답고 작은 마을엔 그녀의 친정 식구들이 살고 있고, 몇십 년을 부대껴 산 이웃들과도 친밀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결혼식날 밤, 라우라의 십 대 딸이 실종되고 몸값을 요구하는 납치범의 협박문자가 온다. 라우라와 식구들은 패닉이 되고,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과거 연인이었던 파코(하비에르 바르뎀 Javier Bardom)까지 나서서 아이를 찾는다.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시간이 흘러가는데, 라우라는 뜻밖에 가족 중 하나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정황을 맞닥뜨리며 어쩔 줄 모른다.


라우라 여동생의 결혼식


▶ 비밀의 생성


  인생을 뒤흔들만한 사건이 벌어지면 무심코 지나쳤던 지난 일들이 태산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가족의 납치와 협박, 이런 사건 앞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란 없다. 감쪽같이 사라진 아이의 빈자리를 보며 가족들은 매우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날카롭게 서로를 대면한다. 사소한 일도 꼬투리가 되고 해명을 요구하는 정황으로 둔갑한다.


 

술에 취한 딸을 방에 데려가는 라우라


  라우라는 아이들만 데리고 남편 없이 친정에 온다. 전엔 없던 일이다. 아르헨티나에서 하는 사업 때문이라고 하지만 변명으로는 궁색하다.

  십 대 딸은 엄마가 나고 자란 곳에서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된다. 지금도 가족 못지않게 가깝게 지내는 이웃 남자가 엄마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은 아이에게 어떤 의미일까. 과거에 파코와 라우라는 왜 헤어진 것일까.

  협박 문자는 어째서 아이 엄마 외에 다른 사람에게도 온 것일까. 파코의 아내 베아는 어떤 여자인가. 그녀는 아직도 가족처럼 끈끈한 파코와 라우라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과거의 영광을 빼앗기고 몰락한 가족이 바라보는 이웃은 어떤 사람들인가.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족 구성원을 어떻게 압박하고 있는가.


딸이 납치된 사실을 알게 된 라우라


▶ 누구나 범인이 될 수 있다!


  비밀을 생성할 만한 물음에 하나씩 답이 드러나며, 납치범으로 의심받을 개연성이 있는 사람들 또한 수면 위로 오른다.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라우라 입장에서는 누구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모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모든 상황이 그럴듯하게 보인다. 지금까지 유지됐던 은밀한 비밀은 차례로 폭로된다. 겉으로 보이는 건 위장과 은폐였고, 몇 년 전에 지나간 과거는 생생하게 현재를 지배한다. 


과거 연인 사이였던 라우라와 파코


▶ 비밀의 속성


  비밀의 기이한 속성 중 하나는, 누구나 알고 있어도 비밀이라는 이름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는 게 통념이지만, 정말 아무도 몰라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아무도 몰라야 한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어서 비밀이 될 수도 있다. 라우라의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비밀로 해야 할 명분이 사라졌다. 비밀을 폭로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비밀을 지켜 유지할 수 있는 이득에 비할 바가 안되기 때문이다.   


라우라와 남편 알레한드로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 진실도 함께 드러난다. 라우라의 친정식구들이 보여주는 끈끈한 가족애 못지않은 편협한 피해의식은 사건을 또 다른 국면으로 몰고 간다. 라우라의 남편 알레한드로(리카도 다린 Ricardo Darin)의 실체는 진실이 얼마나 뼈아픈지 실감하게 한다. 파코와 베아의 견고한 부부관계는 십 수년 동안 유지되어 온 비밀이 깨지며 흔들린다. 이 객관적 진실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어떤 이에겐 꽤 깊은 내상을 준다.  


비밀과 진실을 감당해야 하는 파코


▶ 비밀이 지나간 자리


  적나라한 속내를 드러내며 무너질 듯 보였던 가족은 또 다른 비밀을 잉태하며 조용히 봉합된다. 표면상으론 그렇지만, 이 비밀 또한 언젠가 가족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차라리 영원히 묻혀 잊히는 게 나을 듯싶지만, 아마 그렇게 되진 않을 것이다. 비밀이라는 게 언젠가는 폭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채 세상을 돌아다니는 발 없는 말이니까.


  한편, 새로 공유한 비밀은 누군가에겐 매우 끈끈한 접착제가 되어 운명 공동체를 유지하는 명분이 될 것이다. 세상에 무덤까지 가는 비밀은 있어도, 영생하는 비밀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가끔 비밀의 실체보다 폭로되는 시기가 더 흥미롭기도 하다.


의혹에 휩싸인 라우라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은 「누구나 아는 비밀」을 통해 평범한 가족의 민낯과 실체를 드러낸다. 이 촘촘하고 은밀한 이야기는 보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십 대 소녀가 납치됐는데 경찰도 (거의) 나오지 않고 대대적인 수색이나 매스컴 보도도 없다. 오로지 가족과 이웃들의 내밀한 대화와 표정, 가끔씩 드러나는 일그러진 속내를 보여줄 뿐이다. 가족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도 전적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솜씨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탁월하다. 페넬로페 크루즈와 하비엘 바르뎀 부부의 쫀쫀한 케미는 영화의 모든 시공간을 채우고도 남는다. 감독이 왜 이들 부부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써서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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