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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19. 2019

그동안 난 쓰레기를 먹고살았던 것인가!

다큐멘터리 <The Quest of Alain Ducasse> 2017

  미식가이긴커녕 맛집 찾아다니는 것도 귀찮아하는 내가 세계적인 세프 알랭 뒤카스(Alain Ducasse)의 위대한 여정에 동행하는 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음식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진 선지자이자 전략가다. 요리와 먹는 행위를 예술과 철학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그가, 생존을 위해 매 끼니를 때우기에 급급한 나를 보면 뭐라 할지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다. 마트 외에는 식재료 선택의 여지도 없고, 그나마 인스턴트와 반조리 식품을 애용한다. 난 필수 영양소 따윈 과감하게 무시하며 그날의 기분과 입맛에 따라 대충 먹는다. 그가 보기에 내가 먹는 건 쓰레기에 가깝지 않을까.   


일본 요리를 시식하는 뒤카스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건 23개의 레스토랑과 가장 많은 미슐랭 스타를 가진 이 프랑스 요리 대사는 대대적인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베르사유 궁 안에 ore 레스토랑을 오픈하는 것. 그가 레스토랑 건축현장을 수시로 찾고, 인테리어와 식기를 점검하며, 메뉴와 레시피를 테스트하고, 직원들의 복장과 플레이팅, 서빙까지 체크하는 과정이 장장 2년에 걸쳐 펼쳐진다. 그 와중에, 그는 최상의 식재료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맛을 찾아 세계 각지를 여행한다.


요리는 무한한 우주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다!


  농장이나 정원에서 식재료를 직접 뜯어 맛보는 거장의 모습은 섬세하다 못해 철학적이기까지 한다. 중국 철갑상어 양식장에 가서 배를 가른 상어에서 채취한 캐비어를 맛보며 최상의 식재료를 공수하겠단 의지를 보인다. 브라질 코코아 생산지까지 찾아가는 건, 질 좋은 코코아로 디저트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의 레스토랑 '플라자 아테네' 스텝들도 동행해 이 모든 걸 함께 한다. 이러한 뒤카스의 모습은 셰프라기보다 사업가에 가까워 보인다.


  사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오른 셰프가 요리하는 모습은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보다는 비행기에서 쪽잠을 자며 연구하는 기획자, 전 세계 레스토랑 메뉴를 시식하고 테스팅하며 거시적인 조언을 하는 전략가, 아직 맛보지 않은 음식을 찾아 돌아다니는 호기심 많은 탐험가에 가깝다.


셰프들과 함께 한 뒤카스


고객에게 최고의 경험과 최고의 요리를 선사하려는 거예요.


  그가 전 세계에 있는 자신의 레스토랑을 점검하며 셰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프랑스 DNA를 지키면서 지역의 특성에 맞는 글로컬 한 메뉴와 레시피를 개발하라는 것. 세계적인 사고를 하면서 지역적인 숭고함 또한 잊지 말라는 조언이다.  


브라질 코코아 생산지에서 간 뒤카스


  뒤카스는 세계 각지의 요리를 맛보며 영감을 얻는다. 수십 년을 음식과 더불어 지냈는데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맛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또한 자선에 가까운 좋은 일도 한다. 필리핀에서는 툴로이 재단을 통해 가난한 학생들에게 요리와 레스토랑 경영을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 브라질에선 리우 올림픽 기간 동안 동료 셰프 마시모 브리토와 함께 쓰고 남은 식재료를 모아 빈민을 위한 요리를 하기도 한다. 무엇이든 가능케 하는 이 선구자는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어릴 적 꿈을 실현시키고 있다.

    

파인 다이닝(고급 식당)이란 추억을 파는 곳


  현대 미식 세계에 혁명을 일으킨 뒤카스의 철학과 여정은 분명 열정적이고 가치 있다. 그의 레스토랑이 굉장히 비싸고 접근이 쉽지 않더라도, 한 번쯤 내 몸에 이 거장의 영혼이 담긴 요리를 주고 싶은 욕망도 생긴다. 최고의 경험과 최고의 요리를 위해서라면 한 번쯤 분에 넘치는 만용을 부릴만하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런 만용이 만용으로만 끝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든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셰프들을 지켜보는 뒤카스


  솔직히 이미 성공한 대가가 더 높은 이상을 향해 도약하는 여정은 볼만하지만, 정교하게 플레이팅 한 고급 요리와 입에 넣기 아까울 정도로 어여쁜 디저트들이 화면에 등장해도 식욕이 생기지 않는다. 꽤 좋은 재료를 쓴 게 분명하고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내가 잘 모르는 그 맛은 생생하게 상상되지 않는다.


  그가 베르사유 궁 레스토랑을 오픈하면서 내놓은 '왕의 입'이라는 메뉴는 프랑스 왕과 왕비가 실제로 먹었던 레시피를 최대한 살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식기부터 먹는 순서까지 왕의 식사에 걸맞게 재현하는 것이니 보통 요리는 아니다. 그런 요리를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극소수일 것이다. 한 번쯤 그런 소수에 낀다면 내 삶에 더없이 독특하고 인상적인 경험이 될 수 있겠지만, 괜히 본전 생각나며 속이 밍밍할 가능성도 있다. 뭐 이런 걱정은 일단 베르사유 궁에 가서 해도 늦지 않겠지만.


식재료를 직접 맛보는 거장


  거장 뒤카스는 열정적인 경험을 통해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는 너무 많은 일을 벌인다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멈추지 않고 음식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다. 나처럼 음식은 그저 생존을 위한 한 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바꿔주면 좋으련만. 누군가의 기준으로 본다면 난 허접하고 가치 없는 식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괜찮은 식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단지 좋은 식재료와 정성만 갖고 될 일이 아니다.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이상 하는 '먹는 행위'는 신념과 정성뿐 아니라, 돈과 시간과 내 몸의 상태와 주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행동 양식이다. 내가 이렇게 먹고사는 것은 내 상황에 최적화된 일상을 반복하며 터득한 나름의 노하우일 것이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모험하는 대가


  개인적 취향과 상관없이 훌륭한 메시지와 볼거리가 많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좀 거슬리는 장면이 있었다. 철갑상어 배를 갈랐더니, 내장이나 뼈는 하나도 안 보이고 뱃속 가득 까만 알만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누군가 하는 말. "상어의 배를 가를 때마다 복권을 긁는 기분이에요."


  들고 있던 팝콘을 떨어뜨릴 뻔했다. 난 인간의 섭생과 미식을 위해 희생당하는 동물들에 대한 남다른 동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캐비어 포비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장면은 좀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평생 캐비어를 안 먹겠다는 건 아니고, 나중에 캐비어를 먹을 때 그 장면이 떠오를 것 같아 왠지 좀 심란하다. 사실 캐비어 따윈 평생 안 먹어도 그만이지 않을까. 그게 뭐 대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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