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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ug 04. 2019

엄마는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 아이에게

영화 <어린 의뢰인> 2019년

  영화 「어린 의뢰인」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2013년 경북 칠곡군에서 발생한 ‘칠곡 아동 학대 사건’을 모티브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했다고 한다.  '칠곡 아동학대 사건'은 2013년 8월 경북 칠곡 한 가정집에서 8세 여자아이가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진 후 숨진 채 응급실에 실려왔고, 부검 결과 내부 장기 파열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알려진 사건이다. 아이의 친언니가 "내가 동생을 폭행했다."라고 자백했지만, 조사 결과 자매를 상습적으로 학대한 계모와 친부의 짓으로 밝혀졌다.


민준이와 다빈이


  실화라는 아우라와 아동학대라는 거대한 공분은 이 영화를 세상에 나올 수밖에 없게 했다. 그래서 가슴 아프지만 모든 사람이 보고 한 번쯤은 뜨끔해야 할 영화라 생각한다. 내가 뒤늦게나마 찾아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이가 계모와 친부에게 학대당하고, 부모의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은 떠올리기조차 끔찍하고 마음이 아프다. 진범이 밝혀지고, 죄를 지은 당사자가 죗값을 치른다 해도 조금도 시원하지 않다. 이미 한 아이는 죽었고, 죽지 않은 아이도 상처 받은 채 평생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한 아이를 죽게 만드는 데도 온 마을이 협조한 게 아닐까 싶은 심정을 떨칠 수가 없다.


어린 의뢰인 다빈이


  아이를 학대하는 장본인은 부모지만, 아이의 비명과 울음을 습관처럼 들어 넘긴 아파트 이웃들과 교사, 법의 사각지대를 한탄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사회복지사와 경찰, 그리고 아이가 만난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아이를 조금씩 사지로 내몬 장본인들이다.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어른도 있을 것이다. 이웃 아이가 그렇게까지 학대받는 줄 몰랐다고, 일부러 외면한 게 아니라고.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아이들은 모든 어른들이 공동으로 보호하고 책임져야 할 공공의 가치다. 내가 모르는 아이조차도 말이다. 경찰이나 교사나 의사가 아니더라도, 어른은 세상의 모든 아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라도. 이렇게 말하는 나도 어디선가 들리는 어린 비명 소리를 외면한 적은 없는지 두렵다.  


동생이 죽은 후 혼자 남은 다빈이


  악마 같은 계모와 사는 다빈(최명빈)이와 민준(이주원)이는 사회복지사 사무실에서 알게 된 정엽(이동휘)에게 묻는다. 엄마는 어떤 느낌이냐고. 친모가 너무 일찍 떠나 엄마의 정을 모르고 산 남매에게 세상에서 가장 궁금한 건 '엄마' 자체다. 엄마가 어떤 느낌이냐니. 생각해보면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엄마가 주로 하는 일이 뭐냐, 엄마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뭐냐, 혹은 아저씨 엄마는 어떤 사람이냐, 이런 질문이 아니라 엄마의 느낌을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외면한 걸 후회하는 정엽


  만일 다빈이와 민준이가 나에게 묻는다면, 난 시큰둥하게 '글쎄~'하며 애매한 표정이 됐을 것이다.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있었고, 늘 그 자리에 있는 존재라 '느낌'같은 걸 특별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런 환경이 어떤 이는 누리지 못하는 커다란 행운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행운을 매 순간 의식하고 감사하며 살진 않는다. 대부분 그렇지 않나?


아이들의 계모


  어쨌든 나의 솔직한 대답이 모범답안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상적인 대답이 있겠지만, 그런 말이 오히려 어린 가슴에 상처를 줄 수 있다. 그 아이들은  '그런 (이상적인) 엄마'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별 거 아니라는 듯, 위악적으로 친엄마도 악독할 때가 많다고 할 수도 없다.


  엄마가 있건 없건, 엄마는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 아이가 있다면, 세상은 그 아이에게 결코 좋은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라는 존재는 어린 생명에겐 너무 절대적이라, 물처럼 공기처럼 아이의 삶을 감싸고 있지만 오히려 특별히 의식되지 않아야 바람직한 게 아닐까 싶다. 안정되고 평화로운 나라의 국민들이 국가 지도자가 누군지 크게 관심 없듯이. 살아가는 매 순간이 누군가의 은혜와 희생으로 이어진다는 걸 자각하는 건 나쁘지 않을지 모르지만, 지나치게 빨리 철들게 하고 오히려 세상을 팍팍한 곳으로 여길 가능성이 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구나, 엄마마저도...)


정엽에게 엄마는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 남매


  물론 엄마는 늘 거기에 있어야 하는 붙박이 가구도 아니고, 자식들을 위해 당연히 희생해야 하는 존재도 아니다. 세상의 평범한 자식들은 각자의 개별적인 엄마를  '엄마'라는 보편적인 집단 무의식처럼 대할 때가 많다. 그리고 아주 가끔 특별한 자식 노릇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질문하지 않아도 안다. 엄마가 어떤 느낌인지.


남매


  지금 어딘가에 살고 있을 그 아이는 이젠 엄마가 어떤 느낌이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거 몰라도 잘 살길, 그런 걸 궁금해하지 않고 잘 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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