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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Aug 15. 2019

너희 집만 그런 게 아니야..

영화 <우리집> 윤가은 감독, 2018년 제작

  주로 아이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해온 윤가은 감독의 최신작 《우리집》은 한여름 밝은 햇살 속에 담긴 열기와 그늘을 동시에 품은 이야기다. 어린 주인공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카메라 시선은 시종일관 따뜻하고 정겹다. 그 앵글 속을 들락거리는 아이들은 내용과 상관없이 천진하고 엉뚱하며 밝다. 심각한 고민을 하고 다툴 때조차 귀엽고 사랑스럽다. 이것이 보는 사람의 진솔한 느낌이지만, 사실 이런 설명이 영화 속 어린이들의 (깊고 진지한) 고뇌에 찬물을 끼얹으며 희석시키는 것 같아 조금 찔리기도 한다. 작고 어린 사람을 보는 성인들의 시선은 일방적이기 쉽다. 웬만하면 '귀엽고 앙증맞으며 다소 웃기고 사랑스럽다'라고 정해버린다. 나와 가까운 작은 친구들도 그렇고, 이 영화의 어린 배우들 또한 매우 그러하다.



  《우리집》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누구도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가족 문제를 이야기한다.

  12살 하나(김나연)는 매일 격렬하게 다투는 부모를 보며 불안해한다. 싸움을 중재하려 중학생 오빠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오히려 면박만 당한다. 하나는 가족 여행으로 무너져 가는 '우리집'을 재건하려 애쓰지만, 가족 그 누구도 협조하지 않는다.

  하나보다 어린 유미(김시아)와 유진(주예림) 자매는 어른이 부재중인 집에 살고 있다. 부모는 일 때문에 어린 자매를 떼어놓고 먼 곳에 가 있고, 옥탑방에 단 둘이 사는 아이들은 위태로워 보인다. 자주 이사 가는 게 싫은 유미와 유진이 역시 '우리집'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같은 동네에 사는 세 아이는 친해지면서 같이 놀고 밥을 먹으며 서로의 집을 오간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형편은 다르지만, 세 아이가 원하는 건 한 가지다. 엄마 아빠의 따뜻한 온기가 있는 '집다운 집'이다.


  

천진난만한 세 아이


  가족은 원초적이면서도 고도의 역학 관계가 존재하는 사회적 집단이다. 가장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인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가족 문제는 해체의 위기로 급진전되며 구성원의 삶을 손쉽게 흔든다. 특히 어린 구성원일수록 불안과 두려움에 전면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꼭 나의 일이 아니더라도 어른으로서 안타깝고 미안하기 그지없다.


  하나와 유미 유진 자매는 부모의 불화와 부재라는 위기에 손 놓고 있지 않는다. 아이들 특유의 순수함과 발랄한 생명력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행동한다. 어찌 보면 애어른 같은 하나는 부모와 사춘기 오빠 사이를 오가며 가족 여행을 성사시키려 고군분투한다. 아이의 속내는 순진하고 단순하다. 예전처럼 가족 여행이 부모의 격렬한 싸움을 잠재우고, 엄마의 해외 근무 신청과 아빠의 외도를 해결할 거라 믿는다. 그런 간절함으로 비협조적인 오빠를 약삭빠르게 포섭하는 기지도 발휘한다.


부모의 불화로 고뇌하는 12살 하나


  유미와 유진이는 다른 곳으로 이사 가야 하는 위기 앞에서 당돌하게 대처한다. 부모가 없어도 집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새로운 세입자를 들이미는 집주인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아이들의 이런 행동은 안쓰럽지만 꽤 깜찍해서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깜찍한 행동이 결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가 없는 집에서 동생과 사는 유미


  요리를 즐겨하는 하나는 어리지만 가족을 위해 밥을 자주 한다. 아이가 주로 하는 건 달걀 요리다. 오므라이스, 달걀 샌드위치, 계란찜 등. 요리를 잘해도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 나이에 그 정도 음식을 하는 것도 대견하지만 어린 하나에겐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아이의 진정성이나 간절함과 상관없이 어른들은 각자의 이기심과 목적을 위해 가정을 깨뜨리려 한다. 영화 시작에, 자신이 차린 식탁 앞에서 고성을 주고받으며 다투는 부모의 눈치를 본 하나는 해체 직전의 가족에게 '밥 먹자'는 말로 이 영화를 끝낸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하나의 부모는 아이가 차린 밥을 먹은 후 예정대로 이혼할 것이고, 하나가 그토록 바라던 가족 여행은 아마 영원히 가지 못할 것이다.


옥탑방에서 노는 세 아이


  유미와 유진이는 부모를 찾아 지방 도시까지 모험을 감행하지만 결국 만나지 못한다. 간신히 연결된 엄마의 전화는 허무하게 끊긴다. 어찌어찌해서 다시 엄마와 연락이 돼도, 유미는 집주인 아줌마에게 집을 순순히 내주라는 엄마의 야단을 들을 것이다. 그 후 어린 자매는 땀을 뻘뻘 흘리며 한여름에 이삿짐을 싸고, 친자매처럼 지내던 동네 언니 하나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부재중인 부모의 전화를 간절하게 기다리며 어딘가에서 불안하게 살 것이다.


  세 아이가 주로 하는 놀이는 버려진 상자를 모아 집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저 '우리 집'을 만들고 지키고 싶을 뿐인데 어른들과 세상은 그들의 당연한 바람을 들어주지 못한다. 이 세상에 있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이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하나와 유미와 유진이가 내 앞에서 그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너희 집만 그런 게 아니야! 모든 가정엔 크고 작은 문제가 있고, 너희들 잘못이 아니니 지치지 말고 살아가야 해.


버려진 폐품으로 집을 만드는 아이들


  너무 현실적이고 냉정한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거짓 위로와 희망으로 포장한 위선을 보이고 싶진 않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간절한 염원을 들을 줄 아는 부모였다면 그런 식으로 싸우지도, 아이들을 방치하며 집을 비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테고, '우리 집'의 불행은 안타깝지만 가족 모두에게 배당될 수밖에 없다. 어리다고 예외는 없다. 물론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아이들의 불행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할 테지만.


  내 어린 시절을 돌아봐도 별로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 부모는 이혼하지 않았고 아이들을 방치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들도 심심찮게 다퉜고, 그 어둡고 사나운 얼굴을 볼 때마다 불안하고 짜증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강렬하게 불행했던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냥 행복하지 않았다. 솔직히 좋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빨리 어른이 되길 바라던 시간이었다. 부모의 인간적인 약점과 불합리한 언행을 깨닫기 시작하면, 가족은 결코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 집 또한 완전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늦게 그 깨달음을 주는 게 바람직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영리하며 빨리 자란다.


유미와 유진이 부모를 찾아 여행 중인 세 아이


  하나와 유미 유진이의 부모가 개과천선하지 못해 안타깝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현실적으로 마무리된 건 나쁘지 않다고 본다. 하나의 엄마 아빠가 갑자기 화해하고 훈훈한 가족 여행을 갔으면 기분은 밝아졌겠지만, 그동안 보았던 아이의 고뇌와 진정성이 빛바랬을 거란 생각도 든다. 내가 너무 냉소적인 어른인가. 아이들의 깜찍한 노력에 어른들이 즉각 화답하는 디즈니 가족 영화의 위선적 해피엔딩보다는 차라리 가족을 위해 밥을 차리는 아이를 보는 게 낫다. 안쓰럽긴 해도, 왠지 이 아이는 다소 부침을 겪으며 현실에 적응해 온전한 어른이 될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어린이 배우들 얼굴의 땀방울까지 생생하게 담아낸 화면은 무척 싱그럽다. 영화가 끝나고 무대 인사를 할 때 배우들이 하나같이 작년 폭염에 고생해서 촬영했다고 어필하는 걸 보니 그 땀방울은 절대 분장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대사를 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하는 듯한 그들의 연기 또한 무척 인상적이다. 대본을 주지 않고 상황을 설명하며 자연스럽게 역할극을 유도한 감독님의 세심한 연출 덕분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윤가은 감독님이 밝힌 어린 배우들을 위한 촬영장 지침서다. 스텝들에게 나눠준 종이엔 어린 배우들을 배려하고 보호하려는 감독님의 섬세한 마음이 담겨 있다.


무대 인사하는 감독님과 배우들


  민감하고 여린 어린이 배우들을 보호하기 위해 감독님은 촬영장에 있는 모든 어른들에게 간곡한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어린이 배우들 앞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배우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며, 이동할 때 혼자 있지 않게 보호하고, 어린이들은 어른들을 항상 관찰하며 은연중에 따라 하고 배우니 유의하라는 것. 또한 무심코 하게 되는 외모에 대한 멘트를 금지하고, 아역 배우들에게 하는 신체 접촉이나 칭찬도 매우 조심하고 사려 깊게 해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어린이 배우들을 완전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프로페셔널한 배우로 대할 것을 당부했다. 그저 어른이 할 법한 막연하고 피상적인 주의사항이 아니라, 어린이 배우들과 작업하는 어른들이 반드시 숙지하고 지켜야 할 행동과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지침 전문을 보니, 어린이 배우들의 부모는 무척 흐뭇하고 안심이 되었을 듯싶다. (촬영장에서 이 지침들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윤가은 감독은 내가 최근에 본 사람 중 가장 어른다운 어른이다. 어른다운 어른이 만든 영화 속에 드러나는 어린이들의 고뇌는 그래서 더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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