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아버지의 유산 PATRIMONY> 문학동네, 2017년
좀 냉정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묘사된 누군가의 사투에 가까운 전투를 지켜보는 것은, (스스로 평가하기에) 기질이 그다지 강하지 않고 소심한 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일이다. 1년 전 작고한 작가 필립 로스(Philip Roth)가 죽어가는 아버지에 대해 쓴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자서전이라고 해야 하나) 『아버지의 유산 PATRIMONY』은 흥미롭지만 통렬하고 서늘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명민하지만 냉소적이고 예민한 작가에게 죽어가는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런 아버지마저 책의 소재로 삼아야 하는 건 작가의 숙명일까, 그냥 선택이었을까. 내가 이 책을 든 이유는 이처럼 속물스럽고 단순했다. 내 아버지를 이입하거나 공감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작가 아버지의 개인적인 투병이나 죽음이 궁금해서도 아니다. 어찌 됐건 아버지의 말년을 지켜보게 된 세계적인 작가는 대체 어떤 감정을 느끼며, 그걸 어떻게 표현하고 묘사할지 궁금했다. 정말 그 일이 (반박의 여지없이) 극도로 슬프고 세상이 무너지는 일일까,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부모의 죽음을 맞는 것은 보편적이지만 매우 개별적인 인생의 과업이다. 순리대로 산다면 대부분 부모를 보내드리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아직 경험이 없는 사람에겐 예상할 순 있어도 굉장히 아득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경험한 필립 로스라는 작가는 (글에서 느껴지는 것만으로는) 무자비한 편이다. 그는 따뜻한 감동을 주기 위해 펜을 드는 것 같진 않다. 그렇다고 감각적이거나 화려한 문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퉁명스럽고 통렬하며 냉소적이다. 인물에 대한 묘사는 늘 적나라하고 뜨끔할 정도로 객관적이다. 마침표가 잘 나타나지 않은 문장은 서늘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비유와 묘사로 가득한 만연체다. 쉽게 따라가지지 않지만, 막상 끝까지 확인하고 나면 실소가 나오며 그렇게 명쾌할 수 없다.
아들의 펜 끝에 위태롭게 선 아버지는 죽어가면서도 생생하고 적나라하다. 작가가 아버지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뽑아내는 실타래 같은 문장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죄송하지만) 너무 흥미진진하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적어도 10년 이상 자랐을 듯싶은) 커다란 종양은 아버지의 한쪽 안면을 처지게 하고 시력마저 앗아간다. 죽음은 아내를 먼저 보내고 (여자 친구는 있지만) 혼자 사는 90세 가까운 노인의 온몸을 지체 없이 지배한다. 한때 젊은 아들의 절망이자 원망이었던 아버지는 무력하고 뻣뻣한 짐승처럼 아들의 발치에 쓰러진다. 그 생생한 시공간의 묘사와 감정의 파노라마는 매우 적나라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샘솟는 위트는 죽어가는 여정 또한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한다. 죽음은 당사자에겐 매우 잔인한 주관적인 이벤트다. 하지만 사실적으로 잘 묘사된(?) 죽음은 제 3자의 눈엔 서서히 그러나 빈틈없이 한 인간 속에 파고드는 정밀한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아버지 뇌 속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을지 말지 두 명의 의사에게 검진받고 심사숙고하다 결국 안 받기로 결정한다. 고령의 아버지를 확신 없는 수술대 위에 열 시간 남짓 올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백내장 수술을 해 그토록 원하시던 한쪽 시력을 회복하게 해 드린다. 맹목적인 종양의 압박은 아버지의 사투를 힘겹게 하지만, 그 덕에 작가는 아버지와 끔찍하게(?) 가까워졌고, 그의 기품 있는 전투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사실, 죽어가는 노인의 마지막 날들은 결코 기품 있어 보이지 않는다. 병마와 싸우는 나약한 노인의 고통과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참담한 심정은 암울에 가깝다. 인간을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품위마저 잃고 절망하는 과정은 아무리 미화해도 기품 따윈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안타깝고, 남의 일 같지 않고, 두렵다.
그래도 작가가 아버지의 사투를 '기품 있는 전투'라고 한 것은, 그가 생명이 남아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남은 한 숨까지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프면 아픈 채로,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약한 모습과 두려워하는 심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자식에게도 언젠가 닥칠 미래의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게 부모의 마지막 역할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작가의 아버지는 작가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한 부모였고, 어떤 식으로든 자식이 성년이 된 이후로 가질 수 없었던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란 기회를 줬다.
아버지의 거동이 불편해지고, 급기야 똥을 싸는 일이 벌어지자 작가는 아버지가 몸 밖으로 분출한 오물을 치우면서 깨닫는다. 이것이야말로 아버지의 유산이란 것을.
아버지가 죽기 전에 나 자신을 위해 이보다 큰 것을 요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 또한 옳고,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치워야 하는 것이니까 아버지의 똥을 치우지만, 치우고 난 뒤에는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느껴졌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이때 처음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혐오를 피하고 구토를 무시하고 금기처럼 단단하게 구축된 공포증들을 지나 확 뛰어들면 소중하게 품을 삶을 엄청나게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일을 다 마치고 나니, 왜 이것이 옳고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대로인지 그렇게 분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유산이었다. 그것을 치우는 것이 다른 뭔가를 상징해서가 아니라 상징하지 않았기 때문, 살아낸 현실 그 자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나의 유산이었다. 돈이 아니라, 성구함이 아니라, 면도용 컵이 아니라, 똥이.
작가가 아버지의 똥을 치우며 그 행위가 '아버지의 유산'이라고 쓴 것은 허세나 미화가 아닌 게 분명하다. 작가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돌보면서도 과거에 (지나치게) 건강했던 아버지에게 향했던 적나라한 증오와 원망과 절망을 고스란히 내보인다. 아버지가 무력해지고 거의 파괴되었다고, 다정하게 보호하는 아들의 입장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객관성을 잃거나 마음에 없는 위선으로 작가적 진정성을 잃는 짓은 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그가 쓴 문장들을 보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다.
쓸데없는 조언과 의미 없는 구속으로 (젊었던) 아들을 절망에 소리 지르게 하고, 미치게 만들었던 건강한 아버지는 가족의 마찰에 속수무책인 가정적인 남자였고, 경제적 불확실성에 취약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었다. 사회적 편견에 약한 유대인 이민자의 세련되지 못한 아들이었던 작가는 아버지의 이런 모순 때문에 그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 경멸만큼이나 슬프고 답답한 갈등이 되어버렸다고 회상한다.
사실, 세상 모든 아버지가 그렇지 않을까. 미워할 모든 것이 조금 많거나 덜 하거나, 혹은 사랑할 모든 것을 조금 더 갖췄거나 덜 갖췄을 뿐. '저 아버지는 죽어서까지 자기 아들이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데 계단 역할을 하시는구나.' 이 와중에 나의 숨겨지지 않는 속물근성은 이렇게 또 삐져나온다.
작가는 아버지를 돌보던 중, 50대 중반에 심장에 문제가 생긴다. 수술을 기다리다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져 긴급 수술을 받는 '의학적 소동'을 겪으며, 평생 그 순간만큼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과 아버지의 삶이 비록 똑같지는 않다 해도 서로 얽히고 섬뜩하도록 호환 가능하다는 것을.
삶은 매 순간 넘쳐나는 불가피성과 대면하는 일이다. 죽어가는 과정 또한 삶의 한 부분이다. 작가는 대부분 침착하지만 때론 격정적으로, 그러면서도 유쾌하게 아버지의 죽음을 들려준다. 그 또한 우리가 아는 대로, 1년 전에 영면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그가 사후에 쓰는 자서전이 정말 궁금하지만, 그의 소멸은 그를 아는 사람들의 삶에 또 하나의 불가피성이 됐을 뿐이다. 이런 자전적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볼 순 없지만, 삶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여지가 있는 건 분명하다.
내가 안 읽은 그의 책이 얼마나 남았나, 또 하나 줄어든 걸 아쉬워하며 자꾸 세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