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 윤리학 편> 최영주 엮음, 휴머니스트
버스를 타고 가면 거리의 간판을 주로 본다. 서울대를 나온 수의사 선생님이 하는 곳인지, 동물 병원 간판에 서울대 마크가 큼지막하게 보였다. 대한민국 사람 치고 서울대 마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동네 병원 간판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으니까. '이 병원 의사는 서울대를 나온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환자 진료를 잘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서울대를 졸업한 의사들은 대놓고 병원 간판에 학교 마크를 박아 넣는다. 간혹 다른 학교 마크도 보이긴 한다. 의사의 출신 학교가 병원 영업에 영향을 끼치는 건, 의사보다 환자들이 그렇게 만든 경향이 강할 것이다. 병원뿐 아니라 어디는 안 그럴까.
서울대 마크 안엔 라틴어가 적혀있다. 심미안적으로 볼 때, 그다지 아름답지 않게 욱여넣어져 있는 글씨 'VERITAS LUX MEA'는 '진리는 나의 빛'이란 뜻이다. 진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의 빛이지 서울대생들만의 빛은 아니겠지만, 고등학생 때 특별하게 공부 잘한 학생들에게 마치 특권처럼 주어진 듯한 이 문구는, 그들의 졸업 후에도 생업에 침투해 빛을 발하는 듯하다.
프랑스 대입 시험 '바칼로레아'는 이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우리와는 교육 이상과 체계가 확연히 다른 그 나라의 입시는 시험의 행태와 수준 역시 우리와 매우 상이하다. 우리의 입시도 몇십 년 전부터 논술이 추가되고, 학생들의 창조력을 높이겠다는 목표가 부가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암기식 교육인 데다 복잡한 학종의 폐해와 부작용 때문에 대입이라는 말만 들어도 골치 아프다.
10여 년도 훨씬 전, 바칼로레아 문제들과 모범 답안을 엮은 책이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스스로의 무지와 무식에 질려있던 나는 책들을 구입하고 도장깨기 하듯 하나씩 읽었다. 이 책을 엮으신 분은 머리말에 '바칼로레아의 질문은 개인에 대한 무한한 존중'이라 했지만, 나는 존중받는다고 느끼지 못했다. 책은 매우 흥미롭다. 정색을 한 듯 살짝 무미건조한 인문교양서는 의외로(?) 내 취향이라 읽는 기쁨은 충만했다. 문제는 읽으면 읽을수록 절망에 가까운 한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그때의 절망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걸 느꼈다. 10여 년의 세월은 얼굴로만 맞았지, 뇌는 깔끔하게 비껴간 기분이다. 이번에 읽은 건 '윤리학 편'이다. (『세계의 교양을 읽다』시리즈는 종합, 사회 자연과학, 인문학, 윤리학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접하는 논술 문제들은 (윤리학에 한정 지어 살펴보면) 대체로 이러하다.
▷ 왜 불필요한 것을 욕망하는가?
▷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가?
▷ 종교는 약자들을 위한 위로인가?
▷ 무지는 악인가?
▷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가?
▷ 이기적이지 않은 욕망이 존재하는가?
▷ 여성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 약자의 편에 서야 하는가?
▷ 나쁜 사람도 행복할 수 있는가?
▷ 인간은 더 자유로울 수도 덜 자유로울 수도 있는가?
▷ 우정은 가장 이상적인 인간관계인가?
▷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
▷ 도덕은 관습들의 총체에 불과한가?
이런 질문들 앞에 백지가 놓여있다면 난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니, 어떤 생각으로 논지를 펼칠 수 있을까. 얼핏 보면 상식적이고 이미 답이 나와있는 문제처럼 보인다. 아마 난 일천한 교양을 총동원해 단답형에 가까운 뭔가를 끄적일 것이다. 장황하게 쓴다면, 우기기식 주장이나 논점이 흐린 궤변이 될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 대학 당국은 나를 공부할 소양이 부족하고 지적 호기심이 없는 백치에 가까운 학생으로 판단할 것이다. 프랑스식 공교육을 받지 못했고, 논술 시험을 준비한 적이 없으니 당연한 건가?
제시된 문제의 답은 모범 답안답게 견고한 논리로 서술되어 있다. 논술 문제에 모범 답안이 있다는 게 어불성설 같지만, 논술 문제라서 개인의 생각과 주장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하는 명확한 논리구조가 필요하다. 피상적으로 보이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은, 결국 나의 견해를 타인에게 설득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가령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폐해와 부작용,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 현실과 상충할 때 대처할 행동의 명분과 실리, 만약 약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어떤 상황이 도래할 것인지에 대한 예상까지, 내가 알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피력해야 한다. 그것도 검증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저작을 인용해 논리를 뒷받침해가면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서구는 이해가 상충되는 상황에서 토론과 관용으로 합리적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는 사회다.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모든 나라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을 설득해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선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중무장할 수밖에 없다. 유럽과 북미의 공교육에 독서와 토론, 논술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다. 폭력과 억압이 아닌 대화와 설득으로 합리적인 사회 통합을 이루려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리더를 길러내는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논리적 인간의 양성일 수밖에 없다.
시인 르네 샤르는 명철함이란 “태양으로부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상처”라고 말했다.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인간의 마음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앎이 단지 기쁨만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인하고 싶어 하는 인간 현실의 추악하고 모순된 면마저 보게 하고 생에 대한 낙관적 이상을 접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와의 투쟁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삶은 더욱 견고해질 수 있다. 진리의 문제를 배제한 평화로운 행복은 인간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으며 그것은 향기 없는 조화(造花)와 같다. 생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 동물과 생에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는 신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인간의 방황일 것이다. 그러나 갈등 속에서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의지 속에서만이 인간적 삶의 의미가 발견되며, 그것은 신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인간만의 위대함이다.
개인에 대한 무한한 존중을 나타낸다는 바칼로레아의 질문이 나에게 적용되면, 존중은 커녕 어째서 열패감과 자괴감을 안겨주는지는 저자의 머리말 글에 이미 나와 있다. 나의 무지와 무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래도 가끔 진리는 나의 빛이 아니라 상처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고통’은 ‘무지의 고통’보다 그래도 나은 건가?
바칼로레아에서 문제를 낼 수 있는 자격은 없지만, 나에게 한번 내보라고 한다면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진리는 정말 개인에게 빛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