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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Sep 10. 2019

너는 잘못 날아왔다

책 <너는 잘못 날아왔다> 김성규 시집, 창비, 2008년

                                                                                                                                         

불행과 슬픔으로 가득 찬 시집을 봤다. 가끔가다 선명하게 튀어나오는 이미지 탓에 읽은 게 아니라 본 거란 착각이 든다. 착각이든 뭐든 내가 본 게 불행한 현실의 기이한 보고서라는 건 알겠다. 그 불행한 현실은 10여 년 전에 '시집'으로 나왔고, 시인은 그보다 더 전에 썼을 것이다. 그때의 불행과 슬픔은 오늘 봐도 거리감이 없다. 하긴, 1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강산이 변해도 불행한 사람은 늘 있고, 세상에 흐르는 슬픔 또한 (늘면 늘었지) 줄지 않았다.


입에서 기어 다니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불붙은 쥐떼처럼 기어오르는 강물

옆집 식구들은 우산을 타고 날아갔지만

빨랫줄에 젖은 이불을 너는 어머니

뗏목에 구슬을 싣는 내 발목을 갉아대며

쥐가 무릎까지 달라붙었다

                                                                                                                         버섯을 물고 가는 쥐떼들

                                                                

이 시집의 어딜 펼쳐보아도 불운의 서늘함이 뚝뚝 묻어난다. 단 한 편도 예외는 없다. 그런데 시의 전문을 보면 한 편의 동화 같기도 하다. 물론 행복한 동화는 아니다. 잔혹 동화까진 아니지만. 불행한 세상엔 가난한 부모와 어리석은 노인, 헐벗은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쥐떼나 돼지, 개도 나온다. 어떤 사건인지, 어떤 상황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 시대의 불행인 건 분명하다. 산문이 아닌 게 다행이다 싶다가도 압축해 맺혀있는 글자들이 매우 날카롭게 느껴진다.


해송 몇그루가

무너지는 하늘 쪽으로 팔다리를 허우적였다


그때마다 놀란새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

                                                                                                                   불길한 새


불우한 기운이 강물처럼 흐른다고 시들이 마냥 우울한 건 아니다. 묘하게 유려하다. 그렇다고 삶의 불행이 미화되는 건 아니다. 시인은 삶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적어도 본질을 꿰뚫어 보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을 것이다. 삶은 본질적으로 불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기쁘고 행복한 순간도 더러 있다. 큰 욕심을 안 부리면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이 결국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보면, 소멸을 예약해 놓은 모든 생명체는 본질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죽음' 자체가 불행은 아니지만, 그걸 알고 사는 과정은 태생적으로 불운하다.


내가 '시알못'이긴 하지만, 이 시인이 써놓은 삶의 비애는 유한한 생명체의 본질적인 슬픔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구조적 희생과 불행에 가깝다. 시인은 농촌과 도시 현실의 이면을 들춰내고, 불우한 이웃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더러 불편할 수도 있다. 불행은 쉽게 전염되니까. 시인의 심정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지만, 짐작할 엄두가 안나기도 한다.


모 두 안 전 하 게 살 수 있 어 군인들이 비명을 쓸어담으며 대열을 맞춘다 모 두 안 전 하 게 살 수 있 어 골목길을 찾아 사람들이 뛰어간다


모 두 안 전 하 게 살 수 있 어 빗방울이 공중에 호외를 뿌린다 모 두 안 전 하 게 살 수 있 어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 무릎 꿇은 청년들의 어깨를 밟는다

                                                                                                                           구름에 쫓기는 트럭



사실 나는 시인이 쓴 시보다 시집 말미에 첨부된 시인의 말을 더 유심히 읽는다. 자신의 책 말미에 '작가의 말'을 안 쓰거나 성의 없이 쓴 작가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인들은 누가 시인 아니랄까 봐 자신을 다소 포장해야 하는 글도 참 잘 쓴다. 시인이 10여 년 전에 쓴 이 글을 지금 본다면, 다소 오글거릴까 아니면 흡족해할까 문득 그것이 궁금해진다.

유리창으로 새벽빛이 스미는 것을 본다. 그 빛으로 목욕을 하면 고통이 다 녹아 흐를 것 같은 착각과 함께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묻게 된다. 극도로 피곤하거나 굶주렸을 때 찾아오는 알 수 없는 적의와 지나친 자기 비하, 그리고 무기력증, 그 모든 감정들이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향할 때 몇 줄의 글을 종이에 적어 넣게 된다. 늘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은 실패하며 살아온 것 같다. 나의 우유부단함과 나약함을 겪어온 사람들께 안부를 전한다. 창밖에는 아침 햇살이 쏟아진다. 언제 내려놓아야 할지 모르는 짐을 지우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길, 나의 시가 축복 없는 이 세계에 작은 빛이라도 던져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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