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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Sep 30. 2019

원시림에 뜬 무지개

책 <원시림에 뜬 무지개> 니콜라이 페초르스키, 동서문화사, 1982년

                                                                                                                                                                                                         

어쩌다 이 책만 남았는지 모르겠다. 내 또래들의 어린 시절을 풍미했던 유명한 ABE 전집 시리즈 중 단 한권만 남았다. 이 전집은 88권으로 나왔지만 우리 집엔 절반인 44권만 있었다. 내 기억엔 아빠가 사 오신 책들인데, 다 사기 부담스러워 절반만  들여놓았던 것 같다.


나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독서 목록은 대충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계몽사 소년소녀 동화 전집, 세계와 한국을 아우르는 위인전집, 그리고 어느 날 우리 집에 나타난 ABE 전집. 나는 이 책을 거의 다 읽었다. 계몽사 동화도 재밌었지만 그 전집이 말 그대로 동화스러웠다면, ABE 시리즈는 소설의 아우라를 품고 있었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다. 우리 형제들의 손을 거쳐간 계몽사 동화책들이 나달나달 해지고, 위인전집은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 뻣뻣했다면, ABE 전집은 종이가 누렇게 변하긴 했어도 비교적 상태가 양호했다. 대부분 장편이라 한번 잡으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와 초장에 포기하는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내가 미국의 흑인 노예와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알게 된 건 이 시리즈를 통해서였다. 이 어린이용 소설을 통해, 위인전이나 동화에서 얻을 수 없었던 객관적 사실과 허구적 진실을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었다.


계몽사 동화가 익숙한 구전 동화와 만화 영화의 원작 이야기가 많았다면, ABE 책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장편 소설의 위용을 갖추고 어린이들을 상대했다. 나의 편향된 기억일지 모르지만, ABE 책들 중엔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많았다. 접하기 쉽지 않은 구 소련 작가가 쓴 이야기도 많았다. 책 제목을 떠올리면 구체적인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아도, 이야기의 소재는 대부분 기억난다. 딱히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라도 약간의 호기심만 가지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원시림에 뜬 무지개』는 ABE 전집 44권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내 수중에 남아있는 책이다. 20대까진 이 전집을 다 가지고 있었다. 이사 다닐 때마다 버려야지 하면서도 못 버렸다. 어린 시절 추억이 담뿍 담겨서 그런 건 아니다. 의외로 이 시리즈의 이야기들은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오지 않는 게 많다. 꽤 흥미롭고 유익한 이야기가 많은데 절판되어 사라지는 게 아쉬워 꾸역꾸역 간직했지만 몇 년 전에 다 버렸다. 아깝고 아쉽지만, 낡고 빛바랜 책들은 다시 들춰보기 쉽지 않았다. 자연히 짐이 됐다. 세계 각국의 소년 소녀 주인공들이 쏟아낸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은 더 이상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저 먼 추억이고, 어쩌다 들추면 오래된 책에 서식하는 벌레가 나오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짐 덩어리일 뿐이었다. 이 한 권은 왜 버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종이가 누렇다 못해 갈색으로 변해가면서 나와 함께 성인이 되어 늙어가고 있었다. 새삼스레 다시 들춰보니 낯선 이야기다. 44권 중 안 읽은 책이 다섯 권도 채 안 되는데 그중에 한 권인 듯싶다. 아니면, 30년도 더 전에 읽어서 까맣게 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스크바에 사는 소년 겐까 피조프는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아이다. 나이나 학년이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는데, 말하는 거나 하는 짓으로 봐서 5, 6학년쯤 된 듯싶다. 국어 점수는 바닥인데, 무슨 자만심인지 작가가 되겠다고 자기가 쓴 시를 잡지사에 보낸다. 당연히 모두 까인다. 밉살맞고 튀는 행동을 해서 아빠와 할머니의 걱정을 산다. 겐까는 시베리아에 개척자로 지원한 아버지를 따라 모스크바를 떠난다.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에 도착한 소년은 영하 40도의 원시림에서 혹독한 자연과 맞닥뜨린다. 개척지의 척박한 환경은 소년을 방황하게 한다. 건축가인 아빠의 일은 고되고 위험하다. 추위와 위험뿐 아니라, 새로 만난 친구들 역시 겐까에겐 극복해야 할 생의 난관이 된다. 좀 모나고 무모한 소년의 방황과 성장통은 시베리아 추위만큼 살벌하면서도 아슬아슬하다. 시베리아 원시림의 험난한 대자연은 책에 묘사된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하다. 누군가는 그곳을 개척하고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개척자들은 발전소를 세우고 집을 만든다. 아이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고통을 참아가며 일한다.


이 이야기의 지은이 니콜라이 페초르스키가 1915년 생이니, 그리 오래전 이야기도 아니다. 시베리아가 개발되고 사람이 살기 시작한 지 100년도 안되었다는 게 새삼스럽다. 지금은 '소련'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옛날 사람 티를 내고 싶지 않지만, 내겐 러시아 못지않게 소련도 익숙하다. 30여 년 전에 읽었어야 할, 혹은 읽었던 책을 세월이 지나 다시 읽었지만 딱히 감회가 새롭진 않다. 어릴 때 이 이야기를 접했다면 나와 비슷한 나이의 주인공에게 더 진지하게 몰입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겐까보다 겐까 아빠의 심정으로 책을 읽으면서, 아이의 무모한 모험과 반항이 가상하면서도 밉살맞게 느껴졌다. (나는 꼰대가 된 것인가...)


이제 이 낡은 책을 떠나보낼 때가 된 것 같다. 어째서 44권 중 유일하게 버려지지 않고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겐까를 만났으니 미련 없이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겐까도 내 나이쯤 되었을 땐 자기가 어릴 때 한 짓을 아련하게 추억하면서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 모험심 충만하고 무모한 소년이 누렇게 바래가는 책에서 나온다면, 나보다 더 꼰대가 될지 누가 알까. 나도 내가 이렇게 변할 줄 그때는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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