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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May 27. 2018

모든 것은 변한다, 과연 어떻게...?

책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Yuval Harari


신이 된 인간, 호모 데우스(HOMO DEUS). 인류 미래의 역사는 어떻게 쓰일 것인가!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미래의 역사서『호모 데우스』로 돌아왔다. 그는 일단 책 표지를 넘기자마자 자필로 '모든 게 변한다(Everything Changes)'고 명시해 놓았다. 이 책의 한 줄 콘셉트이다. 당연한 거 아닌가 싶지만, 이 두 단어가 함의하는 메시지는 어마 무시하다. 변화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만큼 빨리, 얼만큼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냐가 관건이다. 누구나 알고 싶어 하고 조바심 내며 추측하는 미래를 이처럼 냉정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낸 이 저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가 책에 써놓은 미래의 초인인가. 초인의 정의를 내릴 순 있지만, 자격 요건까진 갖추지 못한 명석한 학자일 뿐인가.



똘망똘망하게 생긴 유발 하라리

  그가 이 책을 쓰고 원고를 넘기고 출판되어 나오는 그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에도 세상은 숨 가쁘게 변했을 것이고, 하라리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날카롭게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뉴스나 출판물을 비롯한 정보나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양산되고 업그레이드되는 세상에서, 인간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마치 원래 그런 세상에 살았다는 듯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고 취향과 필요에 의해 정보를 선택하고 집중한다. 이렇게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달리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거지? 이런 안일한 인간에게 던져주는 그의 묵시록은 패닉까진 아니더라도 등골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고대부터 근대까지 신을 숭배하는 삶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신성시하는 삶으로 어떻게 삶의 의미를 변천시켜 왔는지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인류는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굶주림, 전염병, 전쟁을 극복하고 다음 목표인 불멸, 행복, 신성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이 새로운 목표는 인간을 신의 경지로 끌어올려야 할 당위성을 포함하고 있다. 호모 데우스가 되지 않는 한, 이 목표는 달성 불가능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목표의 수행과정에서 대다수의 '신이 되지 못하는' 사피엔스들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한다.

굶주림, 전염병, 전쟁의 중세 시대 십자군 전쟁

  그 대가란 대체 무엇일까. 당장 예측할 수 있는 건 인공지능과 데이터의 반격이다. 이미 인간의 일자리를 넘보는 인공지능은 인간 존재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모든 일을 인간보다 능숙하고 빠르게 하는 로봇이 있다면 인간은 왜 필요한가? 태어나서 뭘 하며 살아야 하나? 인간의 존재 의의가 있을까? 과학과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생명공학이 우수한 유전자만 선별한다면, 열등함을 포함한 유전자를 가진 다수의 사람들은 후손도 남길 수 없는 쓰레기일 뿐인가?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근거는 지능과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능과 의식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해 얼마든지 해석되고 예측 가능하다. 내 의식에 의한 행위도 내 몸에 축적되어온 유전자 데이터와 행동 알고리즘에 따른 결과라면, 이는 의식은 없지만 지능을 가진 AI가 나보다 더 합리적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제일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태계 파괴다. 전 지구적인 환경의 역습이 모든 인류에게 공평히 영향을 미쳐도 몸서리 처지는데,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계급마다 다를 거라는 점도 걱정해야 한다. 역사에 정의는 없다. 재난이 발생하면 으레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훨씬 더 고통을 당한다. 애초에 그러한 비극을 초래한 것이 부자들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지구온난화는 벌써부터 부유한 서구인보다 건조한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경고한다.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고. 이 열차는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고, 이 기차를 놓친 사람들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을 거라 한다. 좌석을 얻기 위해 우리는 21세기의 기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21세기의 주력상품은 몸, 뇌, 마음이 될 것이고, 몸과 뇌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들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디킨스의 영국과 마디의 수단 사이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 한다. 실은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간의 격차보다 클 것이다. 21세기 진보의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창조와 파괴를 주관하는 신성을 획득하는 반면, 뒤처진 사람들은 절멸에 직면할 것이라 엄중히 경고한다.


  책을 덮는 순간, 패닉까지는 아니지만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자는 이 책이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가능성을 제시한 거라 우기지만, 이 두꺼운 묵시록은 꽤 신빙성 있는 비관적인 예언으로 한동안 인구에 회자될 게 분명하다. 쉽지 않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저자의 뛰어난 필력 때문인지 독서의 쾌감이 크다. 유발 하라리가 구사하는 수사는 거들먹거리는 학자의 그것이 아닌, 자신의 통찰과 지혜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적절한 은유가 많다.


근대 과학은 종교와 어떤 관계일까? 그동안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온갖 대답을 골백번도 넘게 했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는 500년 동안 부부상담을 받고도 여전히 서로를 잘 모르는 남편과 아내 같다. 남편은 여전히 신데렐라 같은 아내를 기대하고 아내는 계속 완벽한 남편을 갈망하면서, 쓰레기 버릴 차례가 누구냐를 놓고 싸운다.

 초인적 지능을 지닌 사이보그가 살과 피를 지닌 보통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동물 사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된다.

종교와 기술은 시종일관 아슬아슬한 탱고를 춘다. 둘은 서로를 밀고,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에게 멀리 벗어날 수 없다. 기술이 종교에 의존하는 이유는, 어떤 발명이 이루어졌을 때 그 발명을 적용할 수 있는 많은 선택지 가운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지목하기 위해서는 선지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와 현대 과학 사이의 모순은, 많은 사람들이 현미경과 기능 자기공명 영상을 볼 때 못 본 척하고 싶어 하는 '실험실의 코끼리'(분명 존재하지만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론하지 않으려 하는 중요한 문제 또는 논란이 되는 쟁점)이다. 18세기 호모 사피엔스는 신비한 블랙박스였고, 그 내면의 작동 기제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의 일이었다.



  이 책이 흥미진진한 한 편의 영화 같다고 하는 건 좀 그렇지만,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재밌는 다큐멘터리 정도는 된다. 그의 통찰력과 글솜씨에 혀를 내두르다 보면 어느새 서늘한 미래에 설득당하고 상상하게 된다. 저자는 인류의 궁극적 목표는 불멸 신성 행복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평화로운 죽음'이라는 나의 예측도 덧붙이고 싶다. 불멸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인류가 반대급부로 고통 없는 평화로운 죽음을 갈망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지금보다 계급의 격차가 벌어진 미래에는 무한대의 젊음과 영생을 누리는 건 극소수일 테니까. 고대나 중세보다 인류의 생존 가능성이 높은 현대에 자살이 증가하는 것은, 그것만이 마지막 남은 인간 자존감의 표현이기 때문 아닐까. 인공지능이 지켜보지 않는 데서(혹은 인간에게 우호적인 로봇이 곁을 지키는 가운데) 데이터에 포함되지도 않고, 알고리즘으로 예측할 수 없는 ‘고통 없는 평화로운 죽음’이 불멸보다 더 절실하고 행복보다 더 시급한 인류의 신성한 목표가 될 수도 있다. 저자는 20세기가 통째로 하나의 큰 실수로 보인다 했는데, 21세기는 실수 정도가 아닌 절망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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