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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01. 2018

좀 더 객기를 부렸어야 했어!

영화 <Lady Bird> (2017)

 '레이디 버드'의 탄생

 

  가끔 영화를 보며 주인공과 나를 비교하는 유치하고 허무한 짓을 할 때가 있다. 자신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네이밍을 한, 반항기 충만하지만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인 여자애가 그 나이 때 나를 강제 소환했다. 비슷해서가 아니라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애는 그다지 잘 살지 못하는 집에서, 늘 싸우고 반목하는 엄마를 견디며, 엄마보다는 조금 낫지만 내밀한 소통은 하지 못하는 가족과 산다. 영화가 시작하자마 딸에게 등록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대학이나 가면 다행일 거라고 싸늘하게 팩트 폭행하는 엄마. 그런 엄마에게 한 마디도 안 지고 대들다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딸. 이 영화를 현실 모녀 관계의 달콤 쌉싸름한 감성으로 포장하고 싶진 않다. 감독의 의도가 어떻든 난 그렇게 보고 싶지 않으니까.


레이디 버드의 자상한 아빠와 속 깊은 현실적인 엄마

누구나 '레이디 버드'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나이 때의 나는 상상도 못 할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레이디 버드에게, 작작 좀 해라 하고 싶다가도 왠지 통쾌한 기분이 든다. 저런 짓도 기운이 넘쳐나는 저 나이 때나 하지. 그 나이를 오래전에 지나온 내가 그 나이의 젊음과 에너지가 아닌 객기와 반항을 부러워할 줄이야. 나중에 후회할 게 뻔한 이유 없는 반항, 잠시 인격의 한 귀퉁이를 상실한 것 같은 미친 몸부림, 순간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온 몸의 세포를 열고 세상을 흡수하는 그 대담함이 부러웠다. 내가 레이디 버드가 되지 못한 건, 엄격한 가정에서 자란 탓도 아니고 학교나 사회 때문도 아니다. 그냥 나는 용기 없는 못난 사람이라서 그렇다. 유감없이 반항하는 것들은 나름 용기 있고 자신을 끔찍히 사랑하는 애들이다. 얼마나 자신을 애지중지했으면 부모 속을 뒤집어놓고 일탈하며 죄책감 없이 격한 감정을 여기저기 배설하겠는가.


레이디 버드와 그녀의 첫 사랑(?)
레이디 버드의 남자친구


  레이디 버드는 미국의 10대가 할 만한 짓을 빠짐없이 하며 성장통을 겪는다. 못됐지만 아주 막나가진 않는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몸부림치다 이성에 눈 뜨며 들뜬다. 대부분이 그러하듯 첫 경험을 맥 빠지게 해치우고, 진실한 친구와는 진부한 오해로 잠시 소원해진다. 허세 부리다 남에게 상처 주기도 하고 자기가 당하기도 한다. 다소 트러블이 있었지만, 지리멸렬한 집을 떠나 그토록 원하던 뉴욕으로 진학한다. 갑자기 흘러넘치는 자유는 방종으로 넘어가고, 떠나온 집과 가족은 허를 찌르는 그리움이 되어 그녀의 빈 가슴을 후벼판다. 아마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토록 탈출을 꿈꾸며 속박에서 벗어났는데 이 허탈함은 뭐지? 술을 진탕 마시고 응급실에 깨어난 그녀에게 원래 삶이 그런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녀가 이상한 게 아니라, 그녀의 반항과 일탈과 허세가 진부한 게 아니라, 그냥 삶 자체가 원래 진부한 클리셰라고. 이런 말이 이제는 크리스틴이 된 레이디 버드에게 위로가 될까. 그런 클리셰조차 모르고 산 나는 누구에게 위로받아야 하나. 내가 못나서 그렇게 산 거라고 자조하는 수밖에.


전형적인 미국의 십대, 레이디 버드와 그녀의 친구


객기는 부릴 수 있을 때 부려야 한다!


  생산적인 목표가 없는 허세와 반항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시간 때우기에 그만한 것이 없다. 어차피 순식간에 사라질 10대, 일시적인 치외법권 시절은 누릴 수 있을 때 누려야 한다. 지나고 보니 그게 뭐든 다소 험하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더라도, 할 수 있는 건 해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닌 것도, 안 해봤다는 이유로 별 거로 남는다. 오랜 시간 쌓인 미련과 아쉬움은 화석으로 굳어진다.


  누구든, 부모가 지어준 이름 말고 자기 스스로 지은 이름으로 한 시절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것도 한때의 객기니까. 별 가치는 없을지라도 그 시간을 반짝이게 해주는 의미는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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