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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May 29. 2018

질투에서 비롯된 참사

영화 <The Secret Scripture>  (2017)


 사랑의 유효기간을 따지는 것만큼 의미 없는 담론이 또 있을까. 실체 없는 사랑은 과거 완료가 되어도 누군가의 기억과 감정으로 남아있는 한, 영생을 사는 불사조처럼 죽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비밀에 싸인 사랑은 더 그렇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랑, 인정받지 못한 관계, 오해와 억측으로 변질된 진실은 억울한 유령처럼 세상을 떠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사랑의 서사에 유령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을까. 누군가의 삶과 사랑에 귀 기울여야 하는 건, 내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유령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정신병원에서  살아온 로즈


  자신의 아이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50년 넘게 정신병원에 갇혀 지낸 로즈. 그녀를 면담한 정신과 의사 그린 박사는 그녀가 성경에 덧대 써온 글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그녀의 비밀에 귀 기울인다.


  1943년 아일랜드. 젊고 매력적인 로즈는 이모가 사는 고리타분한 시골 마을로 피난 온다. 2차 세계대전은 이 젊은 처자를 도시에서 내쫓았지만, 음침하고 아름다운 마을은 그녀로 인해 생기를 띤다. 아름다운 아가씨는 마을 총각들을 술렁이게 하는데, 술렁이지 말아야 할 남자마저 흔들고 만다. 가톨릭 사제 곤트 신부는 두려움 없이 자신과 눈을 맞추는 그녀의 당당함에 압도당한다. 반 백 년 동안 지속될 불행의 시작이다. 신부의 부당한 욕망의 시선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가져서는 안 될 사랑의 감정을 엄격하고 난폭한 권위로 표출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제의 권위와 욕망에 사로잡힌 남자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신부는 자신의 처지와 감정을 어쩌지 못하는 가련한 남자다. 가질 수 없는 여자와 가져서는 안 되는 욕망 사이에서 질투의 화신이 된다.

곤트 신부와 로즈

  공군 조종사 마이클을 사랑하게 된 로즈는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까지 갖는다. 얼마 후 둘의 동거가 곤트 신부에게 발각되고, 그녀는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영국과 대척점에 있는 아일랜드의 고집스러운 폐쇄성, 개인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시 상황, 권위와 보수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등. 한 개인의 생은 세상과 운명을 함께하며 롤러코스터처럼 출렁인다. 그녀는 사랑한 죄(?)밖에 없는데, 가혹하게 세상에 내처진다. 아니, 갇혀 버린다.


  곤트 신부가 로즈의 이모와 세상 사람들에게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내세운 명분은 님포매니악(Nymphomaniac), 색을 밝히는 여자 환자라는 것이다. 로즈는 젊고 독립적인 여자다. 남자를 밝히고 성욕을 주체 못 하는 위험하고 반 사회적 인간이 아니다. 한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생명 행위를 한 자연인일 뿐이다. 질투에 눈이 먼 사제는 자신의 비틀린 욕망과 시기심을 그녀를 '보호하고 지키는 행위'라는 해괴한 논리로 은폐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다. 로즈가 가까스로 정신병원을 탈출해 아이를 낳자 그녀가 아이를 죽였다는 거짓말까지 한다.


서로 사랑하는 로즈와 마이클


  50년 동안, 아무도 그녀의 진실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 모든 색안경과 선입견과 적대에 힘겹게 버텨온 그녀는 '진정한 사랑의 눈으로 볼 때만이 진실이 보인다'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한마디를 내뱉는다. 이 말을 하고 싶어 50년의 세월을 견딘 것처럼.

 

  끝에 어이없는 반전으로 치닫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한 여자의 기막힌 삶은 먹먹하고 참담하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곤트 신부가 사제를 포기하고 그녀에게 구애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거절당한 평범한 남자의 욕망과, 가질 수 없는 여자에 대한 사제의 질투 중 어떤 게 더 무섭고 집요할까. 2차 대전은 진즉 끝났지만, 그녀의 일생은 포화가 내리치는 전장보다 더 끔찍하고 두려운 전시상황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가슴 아픈 점은, '대체 그녀의 부당한 인생은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는가'이다. 그 어떤 위로나 보상도 잃어버린 50년을 대체할 수 없다. 마지막에 겨우 밝혀진 진실이 그나마 가장 다행인 위로일 뿐이다. 애초에 그녀가 보상이 필요 없는 생을 살았어야 했다는 연민과 안타까움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 때로는 겪어보지 않은 타인의 생이 나의 얄팍한 절박함을 훨씬 능가하는 파장이 되는데, 이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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