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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May 27. 2018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모던 패밀리

영화 <The Kids Are All Right> (2010)

레즈비언 커플의 자식으로 산다는 것은...


  그 집엔 아빠가 없다. 대신 엄마가 둘이다. 사춘기 아이들은 누군가 기증한 정자로 레즈비언 엄마들이 자신들을 한 명씩 사이좋게 낳았다는 걸 안다. 그들은 권태기에 접어든 중년 엄마들의 애처로운 노력을 냉소한다. 특이하지만 지리멸렬한 집안 분위기에 염증을 느낀다. 다문화와 다양화가 존중되는(듯 보이는)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은 특이한 혜택의 수혜자일까, 아니면 비정상적인 가정의 희생양일까.


다양성의 극단을 추구하는 사회


   다양성이 우위를 선점하는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단면을 보여주는 시트콤 <모던 패밀리>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백인 중산층 게이 커플이 베트남에서 입양한 딸을 비싼 사립 유치원에 보내고 싶어 하는데 경쟁률이 만만치 않다. 학비를 감당할 부모의 재산과 아이의 지능은 기본 옵션이고, 그 밖의 변별력이 뚜렷하지 않은 심사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일단 그들은 자신만만해한다. 백인 부모와 아이로 구성된 평범한 가정에 비해, 게이 커플에 베트남에서 입양한 아시아인 딸로 구성된 자신들의 가정이 다양성에서 월등히 우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만심에 찬물을 끼얹는 경쟁자가 나타난다. 한쪽이 장애인인 백인과 히스패닉 레즈비언 커플이 흑인 입양아를 데리고 당당히 등장한 것이다. 동성애자, 입양아, 다인종으로 구성된 가정보다 동성애자, 장애인, 입양아, 다인종으로 구성된 가정의 다양성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누가 누가 더 다양함 속에서 사나, 즉 누가 누가 더 관용과 배려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가정환경에서 글로벌한 미래의 시민이 될 가능성이 높은가에 따라 사립 유치원의 입학 여부가 결정된다.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지만, 일생을 평범하게 산 내가 보기에 평범하(게 보이) 면 역차별받는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다양성 자체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걸 자신의 정체성으로 이용하려는 순간 뭔가 부조리한 현상과 맞닥뜨리게 된다. 모던 패밀리의 저 극단적인 에피소드처럼 말이다.


아이들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폴


  사춘기 아이들은 겉으론 별문제 없이 보인다. 착한 딸은 우등생으로 곧 대학에 입학한다. 아들도 반항기 충만하지만 그 정도면 양호하다. 그래도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들의 전위적 삶에 한방 먹일 준비를 한다. 데스토스테론이 분출하는 아들은 뜬금없이 생물학적 아빠를 찾겠다는 걸로 반항의 포문을 연다. 곧 대학으로 떠날 딸도 청소년기의 마지막 이벤트로 동생의 뿌리 찾기에 동참한다.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그들은 미국 정자 기증 시스템 안에서 생물학적 아버지, 즉 자신들을 있게 한 정자의 주인을 만난다. 생각보다 쿨한 젊은 남자다. 게다 미혼이다. 피가 끌린다거나 유전적으로 닮은 형질을 은연중에 발견하는 신파는 없다. 그들은 서로의 특이한 인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엄마들은 몹시 당황한다. 아이들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순간, 각자 같은 남자의 정자를 기증받아 낳은 아이들을 평화롭게 양육했던 시스템에 에러가 생긴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스템은 진즉에 이상이 있었다. 정자 기증자의 등장은 신호탄에 불과할 뿐, 같은 젠더를 갖고 엄마와 아빠로 역할 분담하며 유지해온 가정은 여자와 남자로 구성된 보통 가정과 똑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아나선 조니와 레이저


레즈비언 커플인 두 엄마 닉과 줄스

  한쪽은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이란 이유로 은근히 주부를 무시한다. 육아와 살림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주부 입장에선 황당하고 어이없다. 각자 낳은 아이들도 균열의 불씨가 된다. 같은 사람의 정자로 낳은 아이들은 공동의 아이이자 각자의 아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는, 아빠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라 낳은 엄마의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서 생기는 은근한 소외와 갈등은 점점 커져간다. 전문직 가장 엄마는 귄위적이고 확고한 룰로 시스템을 유지하려 한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주부 엄마는 그런 가장의 권위에 숨죽이다가 엉뚱한 곳에서 욕망을 폭발시킨다. 아이들의 생물학적 아버지와 외도하며 일탈한다.


가정에서 소외되는 핏줄의 아이러니


  이 영화는 정자를 기증한 남자에게 아무 책임도 지우지 않는 대신, 아무 역할도 주지 않는다. 십수 년 전에 돈 받고 정자를 기증한 걸로 한 가정에서의 역할은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뜻하지 않게 생물학적 아이들에게서 유대를 느낀 남자는 그들과 진지한 관계를 모색한다. 하지만 자유롭게 사는 총각의 삶을 흔든 아이들과 엄마들은 그를 가정 파괴범 취급하며 단번에 내친다. 이 모든 게 처음 그를 찾을 때처럼 너무 간단하고 신속하게 진행된다. 남자는 외도에 따른 도덕책 책임을 지고 단죄를 받아야겠지만, 갑자기 내처지는 황당한 상황에 할 말을 잃는다. 변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두 엄마는 외도의 상처를 극복하고 더 굳건한 관계가 되고, 아이들도 반항을 끝내고 다시 평화로운 가정에 안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생물학적 아빠는 어떻게 되는 걸까. 관용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레즈비언 부부의 삶은, 자신들의 삶 안에서만 용기와 관용을 미덕으로 삼을 뿐 다른 이의 삶엔 그다지 관심 없어 보인다. 그들의 갈등은, 남자와 여자가 이룬 가정의 갈등과 조금도 다름없이 진행되고 봉합된다. 하긴, 여자의 삶이 남자의 삶과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살다 보면 여자 남자를 떠나 부모로, 부부로, 역할과 기대에 부합하고 그러다 균열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도 엄마들은 그렇다 쳐도, 아이들마저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피가 당겨서 만난 관계는 아니니 이해하지만 너무 냉정한 거 아닌가 싶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다문화 사회에서 쿨하게 살아가는 방법인가. 가족은 혈연이나 유전적 유사성보다 함께 한 끈끈한 시간과 정서적 역사로 다져진다는 이데올로기엔 의의가 없다. 그럼 잠깐이나마 그들이 생물학적 아버지와 맺은 유대는 어떻게 되는 건가. 18년 동안 낳고 키워준 엄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몇 주 동안 맺은 그 친밀함은 무의미한 건가.


처음 한 자리에 모인 가족 아닌 가족


  생물학적 아버지를 파렴치한으로 몰아 소외시키는 걸로 이 가정의 평화는 다시 공고해졌다. 그 남자는 단지 이 가정의 깜짝 이벤트였고, 낯선 손님이었을 뿐이다. 남자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삶은 이 가정에 용납되지 않는다. 혹시 모르겠다, 그가 한쪽 엄마와 외도를 하지 않았다면 아빠도 아니고 친척은 더군다나 아니지만 특이한 친구로 이 가정의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지도. 그러나 현재는 생물학적 '아빠'인 그가 빠져야 이 가정은 평온한 무풍지대가 된다. 아무도 거기에 의의를 달지 않는다. 아빠인 듯 아빠 아닌 아빠 같은 그 남자가 좀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들이 레즈비언 부부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부부라면, 아내가 외도한 남자를 아이들의 생물학적 아빠라는 이유로 교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가정엔 아빠가 필요 없는 게 아니다. 아빠는 이미 있다. 가족과 함께 한 시간이 없고, 가족의 역사를 공유할 수 없는 정자 기증자가 필요 없을 뿐이다. 생물학적 유사성 따위는 이들의 장구한 정서적 유대에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그래서 현대의 모던한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면서도 가정 냉정한 집단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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