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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04. 2018

'디킨스'라는 유령의 존재감

책 <The old curiosity shop> C. Dickens.


「오래된 골동품 상점」(Old Curiosity Shop, 1840-41)은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장편 소설이다. 셰익스피어에 버금갈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디킨스는 이 작품으로 대중작가로의  입지를 높였는데, 이 소설을 「마스터 험프리의 시계」에 연재하다 1841년 단행본으로 출간, 당시 판매고가 10만 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소설이 연재될 당시, 미국 뉴욕의 부두가에선 이 책의 마지막 호를 싣고 온 배를 향해 사람들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넬이 살아 있나요?"

 

  소설 속 주인공을 향한 대중의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일화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영화와 오페라, 연극, 뮤지컬, 드라마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사랑받는 고전이다.


  꽤 묵직하고 두꺼운(750페이지 가까이 된다) 소설의 책장을 넘기는 동안, 어쩔 수 없이 180여 년이라는 시차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디킨스 특유의 현란한 문체는 일단 뇌를 압박하기에 충분하다. 선악이 명백한 흑백논리에 아연실색하며 글자를 쫓다 보면,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참혹한 사회상에 심장이 쪼인다. 사실적 묘사와 적나라한 사회 비판, 그리고 다채로운 캐릭터의 향연으로 혼을 쏙 빼놓는가 싶더니, 비극적 결말로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주인공 넬은 천사가 지상에 내려오면 딱 그런 모습일 것 같은, 맑고 투명한 영혼을 지닌 아이다. 도박꾼 할아버지와 함께 빚을 피해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는데, 사악한 채권자인 난쟁이 퀼프를 피해 도망가는 여정은 고행의 순례길이다. 어린 소녀와 노인의 여행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험하다. 그들이 런던을 지나 공업지대를 거쳐 교외 시골로 가는 여정은 다양한 인간군상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고귀한 마음을 지닌 인심 좋은 사람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핍진한 생활을 하는 당시 영국 서민들의 극악스러운 삶과 냉혹한 속물주의가 비정하게 그려진다. 게다가 넬의 할아버지는 도박에 미친 중독자다. 손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넬의 비상금까지 훔쳐서 도박판에 털어 넣는다. 낯설고 위험한 환경에서 제대로 눈도 못 붙이는 넬은 할아버지의 일탈에 절망한다. 그래도 이 천사 같은 아이는 노인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어느 시골 마을에 정착한다. 하지만 이미 기력이 다한 소녀는 시름시름 앓다 이웃들의 안타까움과 눈물 속에 숨을 거둔다.   



  디킨스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도 빅토리아 시대의 소외된 계층의 삶이 현미경을 들이댄 것처럼 세밀하고 집요하게 묘사되어 있다. 디킨스는 어린 시절 채무 때문에 아버지가 감옥에서 지냈던 체험과 자신이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했던 경험을 작품에 꾸준히 투영했다. 그의 작품「리틀 도릿 Little Dorrit」은 아예 채무자가 거주하는 감옥(범죄자가 구금되어 있지만 가족이 드나들며 집처럼 거주하는 형태)이 배경인데, 이 작품에선 변호사의 일터가 디테일하게 보인다. 말이 변호사지, 악마 퀼프의 하인이나 마찬가지인 브래스는 퀼프와 더불어 이 작품의 대표적인 악의 축이다. 악인이지만 퀼프 앞에서 인간이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굴하게 굴 때는, 서글픈 연민마저 든다. 그런 브래스와는 또다른 식으로 사악한 그의 여동생 샐리는 하녀를 굶기다시피 하며 가둬놓고 주먹질을 하는데, 이 장면에선 기가 막혀 실소가 나온다. 당시 영국 빈민가에서는 어쩌다 범죄 사고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사회 현상일 정도로 사기, 절도, 소매치기가 만연했다고 한다. 디킨스의 소설에 감옥과 범법자들과 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사회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넬의 친구 키트(크리스토퍼)와 주변 인물들은 그나마 선량하지만, 키트 역시 퀼프와 엮이면서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까지 한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중 가장 사악하면서 인구에 많이 회자되는 건 역시 난쟁이 퀼프다. 그의 최후는 악마답게 강렬하고 경악스러운데, 이 악인의 매력에 빠진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퀼프를 소재로 책까지 썼다고 한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작가 찰스 디킨스


  디킨스의 소설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가 영국이라는 나라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한 것 같다. 영국을 먹여 살리는(?) 근대 작가를 꼽으라면 여자는 단연 제인 오스틴, 남자는 찰스 디킨스일 것이다. 그들의 작품이 드라마나 영화, 동화로 끊임없이 변주되어 나오는 걸 보면 영국인의 문인에 대한 사랑은 집요하고 고집스러울 정도다. 셰익스피어 이후의 맥을 끊지 않겠다는 집념에서 저러나 싶을 정도다.

  디킨스의 소설은 하나같이 뛰어난 작품성과 탁월한 시대 묘사로 가치가 있지만, 재미가 없다면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장편 소설들은 두 세기가 지난 지금 읽기에 좀 어색하고 당혹스러운 묘사도 있긴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장대한 서사는 말 그대로 동공을 흔들리게 하고 심장을 쪼인다. 또한 인간의 심연을 꿰뚫어 보는 작가의 심미안은 시대를 초월한 묵직한 메시지로 남아있다.

  그의 작품에는 유독 가련하고 애처러운 여자 주인공이 자주 등장하는데, 리틀 도릿과 넬은 영혼의 쌍둥이나 마찬가지다. 디킨스는 어린 소녀의 고난과 불행을, 당시 사회의 참담함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반사경으로 사용한 듯 싶다.


  나의 빈약한 독서 목록에 디킨스를 추가할 때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유령처럼, 그가 나의 주변을 떠돌며 글자들의 무게로 짓누르는 것 같다. 책을 집어던지면 될 텐데 그건 또 절대 용납하지 않는 이 매혹적인 유령은, 두꺼운 책을 늘 맨 뒷장까지 읽게 만들며 서늘한 감동과 송곳 같은 울분은 덤으로 남겨준다. 이런, 죽어서도 철두철미한 작가 같으니라고! 그가 남긴 문장들의 압박은 아마 간헐적으로 내 평생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BBC 드라마나 영화로는 느낄 수 없는, 묵직한 존재감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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