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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n 06. 2018

삶과 죽음 사이의 쉼표

영화  <Wit> (2001)

You have cancer.

  

  '암입니다.' 동정 없는 의사의 한 마디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중년 대학교수 비비안 베어링은 이성적인 판단으로 의사가 제안한 약물 치료 실험에 동의한다. 사실 달리 방법이 없다. 전이성 난소암 말기 환자에게 선택의 여지란 게 있기나 한 걸까. 검증되지 않은 치료를 거부한다는 것은, 별다른 치료법이 남아있지 않은 암 환자가 치료를 포기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


  병원에 환자로 입원하는 순간, 개인은 자신만의 것이 될 수 없다. 치료 가능성이 희박한 병일수록 인격이 무너지는 상황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자신의 몸이 바이러스나 균 혹은 비정상 세포의 숙주가 됐다는 걸 깨닫게 된다. 병이 그렇게 만들기보다 병원, 즉 의료진과 현대 의학 시스템이 그렇게 만든다. 날카로운 지성을 뽐내는 교수였던 비비안 역시 환자복을 입는 순간 암세포의 숙주로 전락하고, 첨단 의료 장비의 대상이 되며, 각종 검사의 피실험자가 된다. 똑똑한 그녀가 동의한 약물 치료는 순식간에 몸과 마음을 무너뜨린다. 암세포가 줄어들고 있다는 의료진의 말은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독한 약 때문에 면역체계가 교란되어 신장을 비롯한 장기와 건강한 세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비비안은 이 고문 같은 치료에 투항하는 것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에 좌절하지만, 그녀 특유의 냉소적인 위트를 잃지 않으려 애쓴다.

 

How are you feeling today?


  의료진이 비비안의 병상에 들를 때마다 습관처럼 하는 '오늘 기분이 어떠냐'는 말은 결코 환자를 위한 질문이 아니다. 환자를 대하는 첫 번째 매뉴얼인 듯 누구도 예외 없이 그렇게 묻고, 대답은 기대하지 않는다. 마치 질문을 던지는데 의의가 있다는 듯이. 이 의례적인 물음은 비비안에게 악의 없는 조롱거리를 제공한다.

  비비안의 주치의 제이슨은 대학 시절 그녀의 수업을 들은 학생이었다. 그때를 회상하며 엄격하지만 수준 높은 강의였다고 비비안을 칭송한다. 그는 자신 앞에 무력한 환자로 나타난 비비안을 보고 처음엔 당황하지만, 차츰 패기 넘치는 젊은 의학도의 모습을 드러낸다. 제이슨이 암을 불멸의 존재라 찬양하며 연구의다운 의욕을  철없이 내보이자, 비비안은 의사들은 그렇게 많이 알아도 더 알기를 원한다며 냉소한다. 사실 그건 학자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교수 시절, 천재적이지만 인간미 없는 학자였다. 지금 그녀는 어린 의사 제이슨이 인간관계에 관심 갖길 바라는 환자가 된 것이다.     


비비안 베어링을 연기한 엠마톰슨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홀로 투병하는 비비안은 평생 연구했던 17세기 시인 존 던의 시 ‘신성의 소네트’에 힘없이 천착한다. 언어를 해부하듯 냉정하게 분석하고 해석했던 죽음에 대한 시구들은, 꿈틀거리는 유기체가 되어 고통이 심해지는 그녀의 신체와 정신에 체화된다. 날카롭고 차가운 지성으로만 채웠던 삶에 대한 회상도, 현대 의학 체계를 조롱하는 위트도 점점 힘을 잃어간다. 결국 그녀는 고통과 두려움에 눈물을 보이며 그나마 인간적인 간호사 수지와 소통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또 다른 잔인한 선택을 종용한다. 비비안은 심장이 멎었을 때 심폐소생 처치를 원하냐는 수지의 물음에 연명 치료를 거부한다. 나중에 그녀가 사망한 걸 뒤늦게 안 의사가 무리하게 심폐소생을 하는데, 그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처치는 보는 동안 분노를 자아낸다.


  서서히 고통에 매몰되어 죽어가는 비비안은 '좋은 마무리를 할 시간'이 없다는 걸 느낀다. 그 어떤 지성과 논리도 고통 앞에선 태연할 수 없다. 그녀가 ‘죽음의 심연을 탐험했던’ 존 던의 시를 연구한 학자라는 사실도 실체로 다가온 죽음 앞에선 위로가 되지 않는다. 죽어가는 비비안을 찾아온 옛 지도교수의 위안만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다. 노교수는 과거에 비비안의 잘못된 연구를 예리하게 지적하며 존 던의 시에 대한 구두법을 바르게 잡아준 적이 있다. 죽음과의 용맹한 사투로 시작하는 존 던의 시에는 느낌표가 아닌 쉼표, 더 이상 타협이 없는 삶과 죽음 사이의 쉼표만이 진실이라고 지적한다. '삶, 죽음...'  


  모든 생명체의 종착지인 죽음은 누구나 각오하지만 언제나 망각하기 쉬운 실체 없는 두려움이다. 공포에 가까운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 직면하기 전까진. 이 영화는 한 생명의 삶 다음엔 죽음이 있지만, 그 사이에 있는 '쉼표'가 우리를 의연하게 하는 '진실'이라고 말한다. 쉼표는 위트가 아니라 진실이다. 누구나 삶의 태도로 위트를 선택할 수 있지만, 쉼표를 찍는 순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타협할 수 없다.  

  비비안이 자신의 지적이고 우아한 삶과 무자비한 고통에 쉼표를 찍는 순간, 그녀의 평생 연구 과제였던 죽음의 시는 그녀에게 항복한다. 위트가 아닌 진실로.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라,
어떤 이들은 너를 힘세고 무섭다지만 넌 사실 그렇지 않다.
네 생각에 네가 해치운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다.
불쌍한 죽음아, 넌 나도 죽일 수 없다.


존 던 '신성의 소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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